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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May 03. 2023

지젝의 시차적 관점 1: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왜 지젝인가?

왜 지젝인가? 일상적 에세이가 주류인 브런치에 철학자의 책 읽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현대철학은 양자역학만큼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대사회 혹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를 열거하려면 간단하다.


보통 병의 증세는 열이 나거나 통증이 나거나 특정 부위의 마비나 장애가 나타난다. 그러나 원인을 알아내기 힘든 병이 늘고 있다. 우울증의 증세는 쉽게 파악되지만 그 원인과 대책을 찾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시점에서 오늘날의 세계에서 자유는 점차 확산되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 구조는 동서 양진영을 막론하고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200년간 부와 소득의 불평등의 원인 분석과 대안을 제시한 ‘21세기 자본’이란 책으로 유명해진 토마 피게티의 새 책은 ‘자본과 이데올로기’이다.


그는 서론에서 “불평등은 경제적인 것도 기술공학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아테네라는 소 등에 있는 쇠파리로 비유했을 때부터 철학은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급진적으로 수행한 철학자가 바로 마르크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서구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비판정신을 복구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나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또는 휴버먼의 ‘자본론’이나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는 바로 이러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지젝은 이들과 약간 다른 접근을 시도하는데 헤겔 우파와 좌파적 관점을 시차적 관점의 차이에 유래한 것으로 보고 라깡식 사유를 동원하여 분리되기 이전의 헤겔적 사유로의 반전을 시도한다. 여기서 ‘시차’(視差, parallax)란 천문학에서 쓰이는 용어로써 관찰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제 우리는 지젝의 뒤집기적 사고가 어떻게 다시 반전되고 지양되는지, 그리고 그의 이런 사고가 또 다른 이데올로기인지 아니면 호르크하이머가 시도했던 ‘비판이론‘의 21세기 버전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과연 세계적으로 극단화되는 불평등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2003년 두 개의 놀라운 이야기들이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한 스페인의 미술사학자는 현대미술이 고의적인 고문기구의 형태로 처음 사용되었음을 밝혀냈다: 브뉴엘, 달리와 함께 칸딘스키, 클레 역시 1938년에 바르셀로나에 지어진 일련의 비밀감방과 고문센터 배후의 영감으로 작용했다.


이는 "심리기술적 고문이라는 형태를 개발한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알퐁스 로렌치치의 작품이다. 그는 프랑코 세력과의 투쟁에 기여하기 위하여 소위 ‘색깔 있는 감옥’을 만들어냈다. 그 감옥들은 아방가르드 예술 이론으로부터 색깔의 심리학적 특성에 관한 영감을 받았던 것처럼 기하학적 추상과 초현실주의 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누워 잠자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침대들은 20도 각도로 들려 있고, 죄수들이 앞이나 뒤로 걷지 못하도록 180센티미터 X 90센티미터 크기의 감옥 바닥에는 벽돌과 다른 기하학적 모양의 블록들이 깔려 있다.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선택은 벽을 쳐다보는 것인데, 그것은 휘어져 있으며, 정신적 혼란과 피로를 야기하기 위하여 색채, 원근법 및 축척을 이용한 착시를 일으키는 향정신 작용을 하는 입방체, 정사각형, 직선 및 나선들로 뒤덮여 있다.


조명효과는 벽에 그려진 어지러운 무늬들이 움직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로렌치치는 초록이라는 색깔을 즐겨 사용했는데, 여러 색깔들의 심리학적 효과에 대한 그의 이론에 따르면 초록이 멜랑콜리와 슬픔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1쪽)

예술이나 미술이 종교나 정치적 목적의 수단에서 혹은 자본이나 상업에 종속된 제작에서 벗어나 ‘예술을 위한 예술’ 혹은 ‘순수미술’을 추구한 것은 18-9세기에 들어서였다. 이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아방가르드 예술, 전위예술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해방적 시각 때문에 혁명을 예찬했던 전위예술가들이 결국 스탈린 치하에서 거의 숙청되고 말았는데 그 후 공산진영에서 예술은 다시 정치에 종속되었고, 자유진영에서 예술은 자본에 종속되는 반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지젝이 예를 든 현대미술과 고문기술의 관계는 순수의 탈순수화가 아니라 예술가와 고문자의 시차적 관점의 차이에 기인한다. 즉 그들이 있는 위치가 시각을 결정하고, 그 시각에 의해 대상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위미술가의 위치는 전위적 위치에서 예술을 창작하는 시각을 가진 반면에 고문기술자 역시 전위적 위치에서 고문의 도구를 제작한다. 관찰자의 위치와 시각애 따라 위의 그림 역시 전위예술작품으로 볼 수도 있고 끔찍한 고문실로 보일 수 있다. 그럼 지젝은 ‘일체유심조’라는 뻔한 불교의 격언을 반복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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