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혁명
캘리니코스에 의하면 평등이 사회적-정치적 요구로 나타난 것은 근현대에 일어난 혁명들의 결과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국 혁명의 급진적 지도자 토머스 레인버러 대령은 1647년 10월 영국 피트니의 논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모든 사람은 먼저 자신의 동의에 따라 그 정부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어서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은 1776년 미국독립선언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로 여긴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 창조주는 양도할 수 없는 권한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했다는 것, 그중에는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이 있다는 것"이라는 구절을 넣었다.
노예제도를 폐지한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키루스 대왕 이후 거의 한 번도 실현되지 못한 만민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에 대한 요구가 신의 뜻에 따라 지위와 신분의 질서 구조가 확립된 고중세적, 봉건적 사회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피를 흘린 혁명이냐? 아니면 명예로운 타협이냐?>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혁명가들이 주장하는 평등 이론은 <평등의 염원과 현실의 차이>를 이미 포함하고 있었다.
레이버러와 제퍼슨이 이야기하는 평등은 남성의 평등이었다. 여기에 여성과 빈민 그리고 노예의 평등은 이념적으로 배제되었다. 1789년 8월에 채택된 프랑스혁명의 주요 강령적 문서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는 더 진전된 이념 즉, 인간과 시민을 동일하게 본다는 의미가 들어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1942-)는 이를 <평등자유 명제>라고 부른다.
발리바르는 <평등자유 명제>의 고유한 특성이 <절대적 비결정성>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 원리가 한편으로는 평등과 자유의 추상적 동일성,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이 둘은 항상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영속적 긴장성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7-8세기에 일어난 사회 혁명은 처음에는 매우 협소한 사람들 예를 들어 주로 부유한 백인 남성에게 이득이 되는 것으로 의도된 이상들이 한없이 확장될 수 있음이 드러났다. 그 결과는 일종의 연속혁명 과정, 즉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노동자, 노예, 여성, 식민지 주민, 유색인, 억압받는 소수민족, 레즈비언과 게이, 장애인 등)이 잇따라 나타나서 이전의 투쟁으로 쟁취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저마다 주장하는 과정이 일어났다.
서구 사회에 등장한 사회주의는 프랑스혁명의 평등 약속과 그 이후에 나타난 사회의 현실이 다르다는 인식에서 생겨났다. 이념적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상징적인 사건과 깃발에 내재하지만, 현실적이고 즉 정치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모순 구조에 대한 인식에 사회주의의 새로운 혁명 이론이 근거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중서부 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 반면에, 자본주의화가 덜 이루어진 러시아와 여전히 농업사회인 중국에서는 러시아 볼셰비키와 중국 공산당이 유혈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새로운 연방체제와 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 데 성공하였다. 반면에 서구 자본주의는 노조를 허용하고, 개량된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정당민주주의 제도로 흡수함으로써 공산혁명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주요 유럽의 국가에서 집권에 성공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예를 들어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민당, 프랑스의 사회당 등)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겠다는 정치적 의지와 전망만을 발전시키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좌파인 노동당이 집권할 시기에 <빈부 격차의 확대 추이>가 시작되었다.
선진국들의 경제성장률이 장기적으로 하락하였고, <조직 자본주의>가 쇠퇴하여 심지어 가장 강력한 국민국가들조차 국내 경제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자본의 국제화가 진행되었는데, 세계적으로 통합된 금융시장에 투자된 자본의 양과 이동성이 엄청나게 증대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평등을 위한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게 된 시점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