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철학자들(1)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 무렵, 선진 자본부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가인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수정주의>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에는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 이론가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여기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논객은 단연코 폴란드 출신의 유대계 여성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였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 법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녀는 1898년 제2차 인터내셔널의 제일 큰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사회 개혁으로만 가는 사민당을 비판하면서 가장 급진적인 좌파 정치 세력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지도부에 참여하였다가 1919년 살해당하여 그 시체는 란트베어 운하에 버려진다. 그녀의 운명과는 반대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폭넓게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란 책에서 사회 개혁과 사회 혁명 사이에는 분리할 수 없는 연관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은 수단이며, 사회 혁명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사회민주주의의 최종 목적인 사회 변혁을 포기하고, 사회 개혁을 계급투쟁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유럽의 대부분 사회주의 정당에서는 체제 전복을 포기하고, 정당 민주주의에 참여하여 개혁의 노선을 가게 된다. 혁명과 개혁의 차이는 전자가 총체적이고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목표로 한다면, 후자는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사회변화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일어난 당 독재가 평등을 가져오기 전에 오히려 권력 독점을 행사하여, 더 불평등한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소련의 붕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리즘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다시 정권을 잡은 유럽의 신좌파 정당의 대표적 지도자인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공동으로 발표한 정책 강령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공정, 사회정의, 자유, 기회의 평등, 타인에 대한 연대와 책임감, 이런 가치관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이런 가치를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적절한 것으로 만들려면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책들이 필요하다."라고 선언하였다. 신좌파 정당이 표명한 이런 정책의 방향을 당시에는 <제3의 길>이라고 불려졌다.
영국의 분석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자인 앨런 칼링은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제3의 길의 본질적 가치들은 자율성, 공동체, 민주주의, 평등인 듯하다"라고 주장했다. 캘리니코스는 이 원칙들을 일반적으로 확인하고 나면, 실제로는 평등에 대하여 점점 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고 경고한다.
신노동당의 평등 정책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결과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을 대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의 평등만을 고려하면 그것은 빈곤의 원인을 다루지 않고 방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의 평등과 다른 차원에서 국가는 지속적으로 기회의 평등을 제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평생교육이나 재취업을 위한 새로운 교육의 기회를 국가가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해야만, 결과의 평등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여기서 <기회의 평등>이란 개념이 세 가지 서로 다른 평등을 아우르는 모호한 개념이란 것을 우선적으로 지적한다. 1) 기회의 평등은 단지 형식적인 차별 금지만을 의미할 수 있다. 2) 기회의 평등은 능력주의를 의미할 수 있다. 3) 기회의 평등을 위한 ‘지위를 위한 경쟁’이 정말로 개방적이려면, 자원의 대규모 평등화가 필요하다. 즉 출발점이 같아야 경쟁이 공정하다. 그러나 실제로 외견상 출발점이 같더라도(대학 수능에 누구나 응시할 수 있어도), 고액 과외를 어린 시절부터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출발점은 다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평등 개념이 그리고 평등에 관한 정책이 그렇게 간단하게 시행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사탕발림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나온 평등에 관한 정책들은 조금 더 세밀히 살펴보면 오히려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영미의 공리주의 전통에 따라 <정의론>을 펼친 존 롤스의 <차등의 원칙>을 해부한다.
좀 어렵지만 복잡한 현실을 알고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진다면, 우선 그 현실을 정당화하는 이론들의 허점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만 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구미 선진국의 평등 지수는 매우 높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보면 결과의 불평등으로 유도하는 이론적 혹은 법적 장치가 교묘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을 파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현실은 불평등하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한, 평등의 원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