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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Aug 19. 2024

창세기의 인문학 12

죽음과 영생 그리고 문명

영국의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인 스티븐 케이브는 20여 년 동안 불멸(IMMORTAL)에 관한 주제로 자신의 전공인 철학을 중심으로 인류학에서 동물학 그리고 현대의 다양한 학문들의 성과를 활용해 『IMMORTAL』이란 대중적 서적을 발표한다. 이 책의 부제목은 <죽음을 이기는 4가지 길>이다.


그는 영원한 생존에 대한 모색, 즉 영생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열망이 '종교의 원천이자, 철학의 뮤즈, 도시의 청사진 그리고 예술 뒤에 숨은 충동의 에너지'라고 본다. 불멸의 욕망은 인간의 본성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으며, 그러한 욕망의 결과로 '문명'이 탄생하였다고 가정한다.


종교과 문명의 출현에 대한 진화인류학자와 뇌과학자들의 설명은 앞에서 정리하였다. 창세기의 서사에서 종교의 출현은 가인과 아벨이 제물 봉헌에서 비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의 후손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종교적 의식(儀式)을 통하여 신과 교통 하는 법을 고안한 것이다. 이는 고대 종교의 공통된 속성이기도 하다.


문명의 출현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그 기초를 닦은 것으로 묘사된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 4:20-22)"

창세기 4장 3절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농경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농업과 축산업 그리고 예술과 기술의 시조는 모두 가인과 그의 후손에게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은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영생을 인위적으로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스티븐 케이브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문명의 본질은 불멸의 추구>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이 정한 곳인 에덴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살았다면 육체적으로도 죽지 않았으리라는 믿음을 가진다. 현대 과학자들은 개체적 생명의 한계에 대하여 명확히 증명한다. 개체의 세포는 무한 증식할 수 없다. 유기적 생명체에는 이미 내장된 시계(유통 기한)가 있고, 유기적 기관을 많이 사용할수록 타이어의 수명처럼 빨리 소진된다.


비록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하더라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먹지 않으면 그의 육체는 일주일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대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었지만 바로 죽지 않고, 930 세를 살고 죽었다.(창 5:5 참)   아벨을 살해한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Nod: 유랑의 땅)에 가서 정착한다. 놋으로 명명한 이유는 가인의 후예들이 비록 문명을 만들었지만, 절대로 자신들의 노력으로는 귀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한 예수의 육체에 대한 논쟁들에서 나오는 하나의 물음은 과연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예수가 제자들과 식사를 마친 다음에 과연 <신성한 똥을 쌌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썩지 않는 몸에서 배출된 것이라면 그 똥 역시 썩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똥만 찾아내면 예수의 역사적 부활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신구약의 서사에서 영생(永生)이란 말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시간의 무한한 연장 혹은 육체의 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생명나무의 생명이란 히브리어 하이( חַי, chay)는 하야(살다)에서 유래하였으며,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living, alive' 상태를 의미한다.


구약에서 영생이란 말은 시편 133편 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원의 뜻을 가진 올람(עוֹלָם, olam)은 긴 기간, 고대, 옛날, 미래를 의미하며, 인간의 유한성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뜻하기도 한다. 3절은 133편 1-2절의 결과이기도 하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신약에서 영생이란 말을 대표적으로 사용한 범례는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영생은 아이오니오스( αἰώνιος, aio-nios: 히브리어 올람의 번역)와 조에(ζωή, zo-e-, life: 히브리어 하이의 번역)의 결합어이다. 신구약의 서사에서 여러 문맥에서 나타난 영생이란 표현은 육체의 불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영생은 원래 위치를 벗어난 인간이 꿈꾸지 못한 다른 차원의 삶을 의미한다.

스티븐 케이브는 인류가 이제까지 모색해 온 영생을 위한 4가지 길(이야기)을 제시한다.  첫 번째 길은 육체적 생존의 길로서 현실적으로는 생명의 연장을 뜻하는 <볼로장생의 이야기>이다. 두 번째 길은  두 번째 삶을 약속하는  <부활의 이야기>이다. 세 번째 길은 육체의 불사를 포기하고, 영혼의 불멸을 추구하는 <영혼의 이야기>이다. 네 번째 길은 우리의 자아를 미래의 시간으로 확장하는 간접적인 방식인 <유산, legecy의 이야기>이다.


그의 결론을 들어보자. "삶에 끝이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시간에 한계를 설정하고, 그래서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죽음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존재에 긴박감을 주고,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존재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도록 허락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는 오직 삶이며, 그 삶이 한정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서 그 소중함을 통감하게 된다."


과연 모든 인간은 누구도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부와 명예가 없이 혹은 어떤 소유나 능력도 없이, 나아가 정신적 유산이나 육체적 복제물이 없이도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을까? 도대체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인간이 가치가 있는 사회가 가능하기나 할까? 문명은 이런 사회를 만드는데 실패했다. 평등주의적인 좌파는 우울증에 빠졌고, 자유주의적인 우파는 무기력을 호소한다. 당신이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적어도 당신에게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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