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의 아브라함, 이집트 왕자 모세와 민족 탈출기
수많은 종교의 어떤 경전도 히브리 성서만큼 구체적으로 자신의 조상을 최초의 인간과 연관시키고, 족보를 일일이 나열하는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서에는 수많은 인물(인명)이 등장하는 데, 대부분은 어떤 중요한 인물과 연관시키기 위한 연결고리로만 의미를 가진다. 왜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자신의 족보(계보)에 집착했을까?
히브리인의 역사를 연구하는 다수의 학자들은 히브리인의 혈통적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단일민족이라 자부하는 한국인의 경우 49.6%의 종족 혈통 유전자 평균값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2000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의 대부분은 인종 상으로는 고대 이스라엘인의 순수 혈통을 지키기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그 어떤 민족보다 구약의 서사에서 찾고 있다. 그 서사가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서사의 주체가 바로 여호와라는 유일신이라는 점에 있다. 대부분 구약의 인물들은 이 신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인물들이다. 그 신은 히브리인들의 시조부터 후손에게 지속적으로 관여한다.
원래 히브리인으로 불려졌던 가나안 이주자들은 그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왕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그 규모가 성경의 묘사대로 솔로몬 시대에 중동을 지배할 만큼 성장하였는지 아닌지는 아직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그의 조상들은 고려의 관리에서 조선의 왕족으로 변모한다. 근동의 고문헌에서 아피루(hapiru) 즉 외국인 노동자 혹은 집시와 같은 떠돌이들로 묘사된 히브리인들은 성서에서 신의 뜻에 따라 <강을 건넌 자> 그리고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재조명된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고, 그의 후손들은 야곱의 12 아들들을 통해, 12 부족 혹은 12 지파로 번성하였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이집트의 고관이 된 덕분에 그들은 기아를 피하여 이집트 고센 땅으로 이주하여 인구를 증가시키기 시작한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던 이집트 파라오는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다신론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 히브리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이 다른 땅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출 1:6-10)"
역사적 사료를 중시했던 이집트의 고대 문헌에는 이런 사실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현대에 와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보수적인 유대교 혹은 기독교인 진영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역사적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고, 보다 진보적인 유대교 혹은 기독교인 진영에서는 솔직하게 만들어진 역사라고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역사서도 과학서도 문학서도 아닌 <계시의 책>이라고 알려져 왔다. 만약 계시의 차원에서만 그 의미의 진의가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라면, 도대체 이 계시가 어떻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성서 해석학의 가장 큰 과제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인문학>은 창세기의 계시에 대한 현대의 여러 가지 층차적 해석을 비교하여 소개하고 있다.
창세기는 모세 오경의 첫 번째 책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모세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세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이 만든 인물인가? 아니면 계시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인물인가? 서구에서 <모세 담론> 혹은 <모세 구별>은 근대 이후 오랫동안 논의되고 조명되어 왔다. 그러나 아시아권에서는 모세란 인물에 대한 연구나 해석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의 모세, 그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과거의 예수,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