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특이한 존재인가, 특별한 존재인가?(1)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대 근동의 여러 창조 설화에서 인간의 창조는 그렇게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서사에서 창조주 엘로힘의 창조는 인간의 특별한 창조에 초점이 있다. 6일의 창조 사역은 인간 창조에서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1장에서 창세기의 기자는 엘로힘이 땅 위의 짐승과 가축과 기는 것은 종류대로 만들었으나, 인간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선포한다. 창조 사역에 이미 가축(iהַבְּהֵמָה, 베헤마, 家畜, Cattle)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신석기시대>에서 이 전승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의 형상(imago Dei, image of God)으로 창조된 인간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서구 지성사>의 핵심적인 과제였다. 초대 교부들은 다른 동물에는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지성(知性, intellectus, ratio, mens)을 신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이와 비슷하게 신유학자인 주희(朱熹)는 <대학>의 첫 구절인 '명명덕(明明德)'의 명덕을 '하늘로부터 얻은 것으로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뭇 이치를 갖추어서(具衆理) 만사에 응하는 것(應萬事者)'이라고 주석하였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지성, 이성을 <자연의 빛>으로 그리고 신의 계시, 은총을 <은총의 빛>으로 구분한 다음, 전자가 후자에 종속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서의 권위보다 교황, 추기경, 대주교에 의해 위계질서화된 제도적 교회가 더 권위를 가진다고보았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천명하였다.
중세사회는 교황의 칙령과 국교회가 세운 교의나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창작물은 금서가 되었고 심지어 어떤 저자는 처형되기도 하였다. 교회의 검열과 감시로 말미암아 <사상과 종교 그리고 표현의 자유>는 국가와 국교회에 의해 억압되고, 소수 권력엘리트와 종교엘리트의 지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르네상스 영향은 성서의 문자적 계시나 교회의 종교적 권위에 종속되었던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다시 고대 희랍시대처럼 동등한 지위로 올려놓기 시작했다. 이성의 복권과 더불어 천문학과 수학 그리고 물리학과 화학이 서구에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영국왕립학회가 있었다.
1660년에 창립된 영국왕립학회의 상징에는 라틴어 “NULLIUS IN VERBA” 이란 문구가 있는데 이는 영어로 "on the word of no one" 혹은 "Take nobody's word for it" 즉, "누구(특히 권력자나 권위자)의 말을 믿지 말고, 모든 것을 의심하며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하라"는 의미이다.
창립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보일은 보일의 법칙을 발견한 화학자이며, 다른 사람은 건축가, 경제학자, 작가 등으로 이들의 학문은 학회는 물론 장차 영국이 <산업혁명>의 요람이 되어 대영제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계시>가 없어도, <천부적 이성>으로만 이루어낸 과학과 기술로 자연을 정복하는 <특별한 존재>임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의 정복이 자연과 생명의 파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지구의 위기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인간은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종>으로 진화한 것이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세계인이 동시에 공감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