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 윌 헌팅: 이성과 경험을 넘어서
1. 생각한다는 것과 본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하여 지식을 습득한다. 한 가지는 이성이고 다른 한 가지는 경험이다. 이성적 지식이 수학적 연산이나 논리적 추론에 의해 구성된 지식인 반면에 경험적 지식은 감각적 수용이나 관찰 혹은 실험에 의해 축척된 지식이다. 이성적 지식은 경험하지 않더라도 타고난 지성을 사용하면 알 수 있는 지식이기에 선천적 지식이라고 한다. 반면에 경험적 지식은 반드시 감각적 관찰을 통해 획득되는 지식이기에 후천적 지식이라고 한다.
이성적 지식과 경험적 지식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3+2=5>라고 머릿속에서 한 계산이 실제 사과 2개와 3개를 합치면 5개가 나온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용을 상상했다 하더라도 아니면 책 속에서 용에 대하여 읽었다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용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학 천재인 주인공 윌 역시 그의 뛰어난 지능으로 말미암아 수학적 난제들을 거침없이 풀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해외여행의 경험도 심지어는 진실한 사랑의 경험도 없는 청소부에 불가하다. 이 영화는 이성과 경험의 차이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아주 핵심적인 장면에서 이성에 의해 구성되고 추론된 지식과 경험에 의해 획득된 지식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 가를 윌을 치료하기 위해 나선 숀 교수의 대사로 표현된다.
2. 파리에 가지 않고도 파리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까?
논리적인 이성은 간접 경험에 의거한 많은 정보들을 스스로 조합하거나 구성하여 직접 경험보다 더 완벽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직접 경험은 어떤 간접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윌과의 일차 상담에 윌의 문제를 알게 된 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윌의 한계 즉 이성적 지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내가 미술에 대하여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 대겠지. 미켈란젤로를 예로 들어볼까? 물론 너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의 걸작품이며, 정치적 야심이며, 교황과의 관계 심지어 그의 성적 특성에 대해서까지도. 하지만 그가 천장화를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향기가 어떤지 너는 알겠니? (.......) 여자에 대하여 물으면 넌 네 타입의 여자들을 이런저런 기준으로 논하면서 장황하게 떠들어대겠지
하지만 한 여인 옆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가 아침에 다시 눈을 뜰 때 느끼는 행복이 뭔지는 모를 거다. 전쟁에 관해 묻는다면 너는 다시 셰익스피어의 명언 따위를 주절거리며 또 멋진 이야기들을 풀어놓겠지. 하지만 넌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전우가 간절한 도움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널 바라보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는 참담함이 어떤 것인지. 사랑에 관해 물으면 넌 멋진 사랑의 시 한 구절까지 읊조리면서 답해주겠지만 한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절망하면서 그 쾌락뿐 아니라 그 아픔까지 뼛속 깊이 느껴본 적은 없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성 없는 경험은 맹목적이고 경험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성은 이미 너무 많은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수학의 세계에서 이성은 이미 램보 교수가 누리는 지위 이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학적 이성에게 결여된 것이 삶의 진지함에 대한 경험적 성찰 이전에 인간의 덕성 혹은 인격에 관한 고려가 아닐까?
3. 이성적 능력과 인간적 덕성이 비례하는 하는 것은 아니다.
윌의 재능을 아낀 램보 교수가 윌의 사회적 일탈행위를 치료할 사람으로 그의 절친한 동기 숀 교수를 찾게 된다. 그러나 램보 교수의 주된 관심은 윌이라는 사람보다는 윌이 가진 수학적 능력 혹은 기능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옛 친구인 숀에 대해서도 램보 자신이 자기 분야에서 성공의 길을 향해 살아왔던 사람이기에 숀을 속으로는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숀은 외면적 성공의 길보다는 자기만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윌에 대한 두 교수의 대화는 두 사람의 입장을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램보는 윌의 능력을 개발해서 윌을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숀은 윌이 가진 고통의 근원을 발견하고 치료함으로써 사회와 화해시키는 길을 택하게 된다.
제럴드 램보: "제대로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앨버트 아인슈타인도 스위스 특허청의 말단 공무원으로 끝나버렸을 것이고, 아인슈타인에 의해 창조되었던 여러 가지 과학적 업적은 불가능했을지 몰라. 윌은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우린 윌에게 옳은 방향을 제시해 줘야만 해."
숀: "그런 학문적 성취의 궁극적 목적이 과연 뭔가. 태드 카잔스키 아나? 60 년대에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친구로 엄청난 수학적 업적을 남겼지. 특히 Bounded harmonic functions에서. 그리고 그 친구는 버클리에 가서 조교수로서 굉장한 가능성을 보여준 다음 몬태나에 가서 모든 경쟁을 장난같이 뛰어넘었단 말이야. 그가 바로 유나바머야. “
4. 사랑과 관심만이 단절된 모든 것을 화해케 한다.
지성의 능력만큼 인격의 성숙이 비례한다면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인간 사회에서 능력과 인격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방면의 권력 엘리트들이 사회를 주도하고 있지만 그들의 능력만큼이나 인격이 따라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격을 성장시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 그리고 관심이기 때문이다.
숀은 윌에게 윌이 가진 일탈 성향이 윌 자신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줌으로써 윌이 사회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모든 일탈행위의 책임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스스로 원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행위의 불가피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일탈행위의 핵심에 애정 결핍과 배려의 부족이 있다. 그 애정의 주체가 누구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