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본문은 크게 1부의 물리적 개체화, 2부의 생명체들의 개체화란 주제로 서술된다. 다시 2부의 2장에서 정신적 개체화가 논의되고 2부의 3장에서 개체초월적인 것의 기초들과 집단적 개체화란 장으로 이어진다. 서론에서 우리가 구분했던 물질-생명-정신-집단의 개체화 과정이 책 전체의 구조에서는 생명의 층위에서만 정신과 집단의 개체화 과정이 논의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일반 저자들처럼 머리에 준비된 형상적 도식을 그리고 그 안에 여백을 질료적 내용으로 채워나가는 일종의 건축학적 글쓰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전체의 내용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박사학위 논문이나 아니면 전문적인 연구 저서를 출판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나 원래 필자가 의도한 이 에세이들은 그의 생성론적 사유가 흐르는 흐름의 방향과 목적지를 독자들과 더불어 함께 흐르며 공명하는 장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흐름에 따르되 형식적인 목차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고 요약하며 내용의 전개를 재해석하는 능률적 전략을 짜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실 인생은 유한한 시간으로 한정이 되어있고 인간은 주어진 시간을 어느 곳에 투자하는 것이 시간의 사용가치를 변환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금 같은 시간을 투자해서 은을 산다면 반대로 금을 투자해서 다이아몬드를 산다면 결론은 뻔하다. 보다 적은 가치를 더 큰 가치로 교환하는 것은 물질-화폐적 가치 교환으로는 분명하게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세계에서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그렇게 경제적으로 확연하게 측량되지는 않는다. 독서와 사색이 반드시 자아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으나 반대로 너무 많은 책을 읽거나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제한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경에서 가장 철학적인 책인 [전도서]에는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반드시 많이 고민한다고 물음에 좋은 방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지성은 사물을 인식할 때 사유의 논리적 규칙에 감각을 통해 뇌에 들어온 감각자료들을 처리한다. 예를 들어 정원에 자라는 식물들을 관찰할 때 장미와 튤립을 인지하고 구분하는 사고 작용의 배후에 동일률(A=A: 장미는 장미이다)과 배중률(A ∨ ¬A: 장미는 장미이거나 장미아니거나 그 둘 중 하나이다)이 있다. 아이는 엄마를 매일 접하면서 어제의 엄마와 오늘의 엄마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동일률에 이해 확인한다. 어제의 엄마와 오늘의 엄마와 동일한 이유는 곧 그 엄마는 엄마이거나 엄마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사고 이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규칙이 바로 동일률과 배중률이다. 그러나 시몽동은 전개체적 수준의 존재에서는 이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모든 개체화 이전에 파악된 존재의 수준에는 배중률과 동일률은 적용되지 않는다. 이 원리들은 이미 개체화된 존재자에게만 적용된다. 그것은 환경과 개체로 분리된 빈약한 존재자를 정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 논리학은 개체화를 사유하기 위해 이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체화 작용을 개념들과 더불어 그리고 개념들 간의 연관과 더불어 사유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개념들은 부분적인 방식으로 고려된 개체화 작용의 결과들에만 적용된다." 전개체적 존재의 상태에서 정원의 씨앗이 포화상태에서 특정한 기후와 공명하여 발아하고 개체화 과정을 거쳐 나중에 특정한 개체적인 꽃으로 피어날 때, 즉 장미와 튤립의 형태로 개체화된 이후에만 장미는 장미이고, 튤립은 튤립으로 사유된다.
이제 저자는 동일률과 배중률을 협소한 의미로 축소시키면 변환(transduction: 하나의 구조가 인접한 영역으로 전파되면서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방법이 도출된다고 본다. "우리는 변환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그것은 우선 물리적,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적 작용이다. 이 작용에 의해 한 활동이 한 영역의 내부로 점점 접근하여 퍼져나가는데 이러한 전파를 기초로 하여 그 영역의 구조화가 점점 위치를 넓히면서 이루어진다. 각 구조가 형성된 영역은 다음 영역에 구성원리로 작용한다."
시몽동이 이 변환의 가장 기초적인 현상으로 예시를 드는 것이 바로 결정(crystal)의 형성 과정이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소금의 결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포화된 소금물(전개체적 상태)에서 작은 결정핵이 형성되고 이어서 그 결정의 구조가 주변으로 전파되어 같은 구조가 계속 확장된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주어진 개체화된 소금들의 물질적 원소 분류나 실제적 활용도에 관심을 가지지 그것이 어떻게 개체화되는지에 대하여 면밀해 관찰하기 전에 그것의 구조가 이미 정해진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은 소금의 결정 구조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면서 퍼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생성은 다른 층위의 생명적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무기물인 소금이 어떻게 생명의 순환 속으로 들어가고 변환(transduction)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자. 광물(소금) → 식물 → 초식동물 → 포식자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물질은 단순하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구조 속에서 새로운 기능으로 조직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자연(바다, 토양, 암염층, 염전)에서 소금은 단순한 무기 이온 Na⁺ Cl⁻의 상태이다. 식물은 뿌리를 통해 토양 속 이온(Na⁺ K⁺ Cl⁻)을 흡수하고 이 이온들은 식물 세포 안으로 들어가 삼투압과 전기적 균형을 형성한다. 무기 이온이 생명 조절 메커니즘으로 조직되는 것이다. 이것이 물질의 생명적 변환이다. 초식동물은 식물을 먹거나 염분이 있는 흙, 암염, 염천을 핥아서 소금을 간접 섭취한다.
동물 몸에서는 소금은 신경 신호 전달과 근육 수축, 혈액 삼투압, 산-염기 균형에 사용된다. 소금은 더 이상 광물이 아니라 일종의 생리적 전기 시스템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특히 신경계의 신경 신호는 Na⁺ 이온 이동으로 발생한다. 즉 광물이 생명체의 신경 신호가 된 것이다. 그리고 늑대나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포식 동물들은 초식동물을 먹으며 소금을 섭취한다. 이 단계에서 소금은 단순 생리 기능을 넘어 복잡한 행동 시스템(신경계 기능, 감각 체계, 근육 반응, 사냥 행동)으로 변환된다. 그러므로 소금이란 광물은 생명 활동 → 행동 → 생태계 관계로 확장된다.
생태계의 순환 구조에서 기본적인 소금이 가지는 기본적인 정보(Na⁺ Cl⁻)는 변환의 과정 속에서도 보존된다. 이 점에서 시몽동의 개체론적 생성론은 헤겔의 변증법적 생성론과 다르다.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존재 안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시간적으로 진보하면서 그전 단계의 차원보다 더 높은 단계의 차원으로 이행한다. 발전된 단계로 이행하는 것을 헤겔은 지양(Aufhebung: 폐기, 보존, 상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몽동에게서 변환은 모순 해결을 통한 상승 운동이 아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는 존재를 이미 완성된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잠재적 에너지와 긴장이 있는 장(field)으로 본다.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보자. "변환적 질서는 구체적인 모든 것을 보존하며, 정보의 보존으로 특징지어진다. 반면 귀납은 정보의 손실을 필요로 한다. 변증법적 행보와 마찬가지로 변화는 대립된 국면들을 보존하고 결합한다. 그러나 변증법과 달리 변환은 발생이 전개되는 틀로서 시간의 실존을 가정하지 않는다. 시간 자체가 해결이자 발견된 체계의 차원이다. 시간은 개체화가 그것들에 따라 수행되는 다른 차원들과 마찬가지로 전개체적인 것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시몽동의 시간관과 헤겔의 시간관이 갈라진다. 헤겔은 시간이라는 흐름이 이미 있고 그 속에서 역사와 변화가 진행되나 시몽동에게는 변화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 과정 속에서 시간이 생겨난다.
시간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다시 논하기로 하고 이제 형상과 질료라는 이원론적 구분과 형상 우위론에 바탕을 둔 전통적 형이상학과 형상적 주체 우위의 인식론과 윤리학을 시몽동이 어떻게 개체화 과정이라는 생성론으로 대체(혹은 해체)하는 그 단서를 찾아보고 이 에세이는 마치기로 하자. "다양한 수준의 개체화의 기초인 변환의 과정을 사유하기 이해서는 형태(형상)의 개념으로는 불충분하다... 형태의 개념은 정보(형태부여)의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정보는 개체화될 수 있는 준안정적 평형상태의 체계가 존재함을 가정한다. 정보는 형태와 달리 유일한 항이 아니라 불균등화에서 솟아나는 의미작용이다."
가장 형상 우위론에 바탕을 둔 설명 방식은 지난번엔 건축을 예로 들었지만 이번에는 조각을 예로 들어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여러분이 이탈리아나 그리스를 방문하면 수많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상들이 거리나 건물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 조각상들은 주로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거나 아니면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많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5미터 정도의 다비드상이(다윗의 조각상: 현재에는 복제품이 광장에 세워짐)이 있다. 조각가는 먼저 다윗의 형상을 머리에 그린 다음 대리석이란 질료에다가 그 형상을 조각한다. 그러므로 조각상의 본질은 대리석이 아니라 다윗의 형상이다. 물론 이 형상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그림이나 기존의 이미지에 영감을 받았거나 아니면 성서 이야기 속에서 떠오른 인물의 형태를 도안으로 했을 것이다.
이 예를 시몽동의 개체화 과정으로 설명해 보자. 미켈란젤로가 작업한 대리석은 평범한 돌이 아니라 특별한 상태에 있는 돌이었다. 그것은 이미 다른 조각가가 작업하다가 실패한 돌일 수도 그리고 내부 균열이 진행되는 돌이거나 길고 얇은 블록 형태의 돌이었다. 이 상태는 개체화 과정의 전개체적 상태이자 동시에 긴장 상태를 의미한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말은 시몽동의 개체화 과정을 더 이해하기 쉽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그는 조각을 할 때 자기 머릿속에 있는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돌 속에 있는 인물을 해방시킬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조각은 돌에 형태를 넣는 것이 아니라 돌의 조건과 상호작용하며 구조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시몽동적으로 보면 다비드상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대리석 블록에서 부분적 조각으로 그다음엔 형태 구조 발생과 균형 형성 이후 조각상이 완성된 개체화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조각상은 언젠가 다시 부서져서 가루의 형태로 해체되어 전개체적 존재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