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영화 속의 미학
1. 미의 모방과 보존으로서 예술
예술의 일차적 목표가 미의 모방과 보존이라면 향수라는 영화는 예술가의 예술적 행위를 미학적으로 가장 잘 정의한 영화로 볼 수도 있겠다. 풍경을 그리는 화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작곡가는 전원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를 음악으로 재현하기 위해 작곡을 한다.
먼 산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은 분명히 비에 대한 예고이다. 그리고 황혼 녘에 불타는 노을은 다가오는 어둠에 대한 예고이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지적 정보나 예시를 주기 이전에 일종의 정서적 감흥을 유발한다. 먹구름이나 노을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어떤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예술의 기원을 노동이나 주술, 제례 등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자연의 경이로움이 바로 미적 체험이나 예술적 창조의 또 다른 기원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예술가는 자연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예술미를 창출한다. 예술가가 처한 상황이 나쁘면 나쁠수록 작품은 더 이상적이 되어간다.
2. 예술에 대한 반성으로서 미학
미학은 예술가의 예술적 행위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창작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근원에 대하여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 미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향수’란 영화는 미학적인 영화이며 메타-예술적인(예술 자체를 문제로 삼는 예술) 영화이다.
영화 ‘향수’가 독특한 점은 후각의 세계를 아직까지는 영상과 사운드로 제한된 스크린에서 표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종합예술의 장르이지만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문학과 미술, 음악의 융합에 한정되고 있는 것이다. 후각과 촉각 그리고 미각을 결합한 총체적인 가상 체험이 언젠가는 가능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후각 경험을 후각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어가 모든 체험을 언어적인 상상력으로 대체하듯이 감독은 원작자가 그려내는 후각의 세계를 영상언어로 대체하여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이나 여인을 화폭에 담아 영구히 보존하려는 의도가 미술을 만들어내었다면 작가는 동일한 의도로 아름다운 향기를 향수로 만들어 보존하려는 후각의 예술이 바로 향수 제조업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3. 자연미의 결정체로서 여인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자연 진화의 결정체이며 동시에 자연 창조의 완성체이다. 창조론이나 진화론이나 자연의 총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점에는 의의가 없다. 신이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유일한 피조물이 바로 아름다운 인간이다.
오랫동안 화가들이 즐겨 그려왔던 여인의 누드화는 인간이 생각하는 미의 정점이 여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예술 소비자들의 소비적 관심도 고려된 것이지만 영화 제작의 핵심 역시 여배우의 캐스팅에 있다는 사실도 위와 동일한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영화 ‘향수’ 역시 최상의 향기를 자연의 향기가 아니라 여인의 향기로 가정하고 있다. 주인공의 향기에 대한 탐욕은 자연의 향기를 넘어서 여인의 향기를 수집하고 보존하는데 집중되고 있다. 그리하여 꽃을 따듯이 아름다운(향기로운?) 여인을 죽여서 그 향기를 채집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영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4. 미적 이상과 미학적 유토피아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아름다운 현실을 보존하거나, 추악한 현실을 폭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는 자기만의 공상을 재현하거나 악몽을 재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는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작가의 미적 이상 혹은 미학적 유토피아가 나타나고 있다. 만약 작품이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 낼수록 그 반대편에 작가의 이상 세계가 반증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애호가들의 입장을 가장 잘 반영한 ‘시네마 천국’이란 작품은 말 그대로 영화를 통해 이상 세계를 꿈꾸는 예술가 혹은 감독의 미적 이상을 잘 그려주고 있다. 예술가에게 천국은 자유로운 예술 행위와 표현 그리고 감상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예술적 감흥 속에서 하나가 되는 미적 이상을 실현하는 곳이다.
‘향수’에게 이런 미적 이상은 주인공이 채집한 향수가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는 상황으로 연출된다. 예술 작품이 감상을 위한 것이라면 향수 역시 만인의 후각에 공유되어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예술 작품이 작가의 고뇌와 고통 그리고 노력으로 산출되는 자기희생의 결과라면 ‘향수’의 향수는 타인을 죽여서 채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미적 이상과 도덕적 이상은 극단적인 대립구도로 나타난다.
5. 미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상 사회를 묘사한 ‘공화국’이란 책에서 예술가(시인)를 추방할 것을 명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거짓된 이야기로 청년들의 영혼을 타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와 같은 미적 진술들은 사실에 관한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 느낌, 취향에 기인하기 때문에 과학과 같은 객관성을 가지기 힘들다. 더구나 작품이 가진 예술성이 그 시대의 윤리적 기준과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미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의 상호 대립 혹은 독립 여부에 대하여서는 유사 이래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현실사회에서는 항상 윤리적 가치가 미적 가치를 제어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당대의 윤리적 관념을 넘는 것을 창작의 과제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주인공을 교수대에서 죽이지 않고 스스로 자살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