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사랑의 이상: 마음의 행로
1. 나는 기억의 근거인가? 아니면 기억의 다발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곧 자아의 정체성을 묻는 말이다. 자아에 대하여 두 가지 이론이 존재한다. 나는 내가 경험한 모든 과거 기억의 다발이 바로 나이다. 만약 기억이 전부 지워진다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자아를 설명하는 방식을 경험적이고 현상론적인 자아론이라고 한다.
반면에 기억이 지워졌다 하더라도 경험의 주체가 되는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 모든 의식은 바로 자기의식을 수반하며 이 자기의식이 바로 자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기억의 근거이지 기억의 다발이 아니다. 자아를 이렇듯 모든 경험이 가능한 실체적 근거로 파악하는 입장을 형이상학적이고 실체론적 자아론이라고 한다.
만약 우리의 경험을 그려진 그림에 비유한다면 종이는 바로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그림 없는 종이는 백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백지는 존재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종이 없이 그림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체와 현상은 공존한다. 따라서 두 가지 자아론은 서로 보완적일 수 있다.
2. 사랑은 경험의 공유인가? 아니면 영혼의 교류인가?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감정과 경험을 공유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감정과 경험이 반복적으로 쌓여갈수록 사랑은 깊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기억에서 그 모든 감정과 경험이 지워져도 사랑은 유지될 수 있을까?
경험론자들에 의하면 남녀 간의 어떤 사랑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별하게 발생하였기 때문에 사랑에 관한 모든 기억이 지워졌을 경우 동일한 상황과 사건이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 반복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자들은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이 어떤 외형적 조건에 달려 있기보다는 보다 내면적인 교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본질적인 사랑은 서로의 외모나 조건에 끌려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인 이끌림에 기인한 것이기에 기억과 상관없이 다시 서로 사랑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3. 멜로 영화의 고전 Random Harvest
영화의 원 제목은 랜덤 하베스트 즉 일정치 않는 수확이었으나 우리말로 마음의 행로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영화이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방황하는 기억상실증 환자와 그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는 여인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멜로 영화의 대명사라고 불리어지는 영화이다.
한 여성의 남자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다분히 남성 중심적인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 여주인공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남자 주인공이 성공할 수도 그리고 결국엔 기억을 찾을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아주 적극적인 여성상을 그려낸 여성영화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려내는 사랑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이다. 즉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만남으로 그려진다. 흡사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전생의 연인이었던 사이로 생각될 정도로 두 사람의 끌림은 필연적이다. 그리하여 몇 가지 방해요인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기억을 되찾고 완전한 사랑을 성취하는 것이다.
4. 소유의 사랑과 존재의 사랑
폴라가 찰스를 사랑하는 동기가 그렇게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폴라의 찰스에 대한 사랑은 다분히 존재적이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병든 군인을 폴라가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영화에서 충분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공한 찰스와 결혼한 후에도 폴라는 여전히 그 성공의 대가를 충분히 즐기지 않고 오히려 과거의 순수한 사랑을 그리워한다.
비싼 보석을 선물 받고도 폴라는 예전에 가난했던 시절에 찰스가 선물했던 값싼 목걸이를 다시 꺼내곤 눈물을 흘린다. 여기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의 형이상학적 사랑은 소유를 초월한다. 그리고 소유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주인공은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낭만적인 사랑을 결국에는 쟁취한다.
작가의 자아관이 형이상학적이듯이 작가의 애정관도 낭만주의적이다. 그리고 대다수 관객들의 기대도 낭만주의적 결말을 예상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결말을 다 알고 기대하고 예상하며 관객들이 스토리를 따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지루하지도 긴장감을 늦추지도 않고 있다.
5. 사랑의 가변성과 불변성
만약 우리의 사랑이 조건과 소유에서 시작했다면 그 사랑은 가변적이다. 왜냐하면 조건과 소유는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외모와 부는 지속성도 있지만 일시에 파괴되거나 상실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존재나 인격에서 시작했다면 그 사랑은 살아있는 한 불변적일 것이다.
고전 멜로 영화의 가장 일반적인 주제는 변함없는 사랑(Everlasting Love) 혹은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남녀 간의 사랑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나마 그런 사랑을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가상적으로 체험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