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철학 9: 모던 타임즈

모던 타임즈: 소외된 노동

by 박종규

1. 기계와 노동


근대는 기계의 시대이다. 르네상스 이후 종교에서 해방된 이성은 수학과 물리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그 결과 근대의 과학자들은 자연 속에 내재하는 기계적 원리들(힘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근대인에게 자연은 하나의 기계 장치로 보였기에 이것을 응용한 인위적인 기계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증기 기관이 발명되었다.


산업혁명의 기초는 바로 증기 기관이라는 기계의 발명이다. 그리하여 생산력의 기초는 인간의 노동력에서 기계의 마력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수의 인간은 기계에 종속되면서 노동 역시 기계적인 노동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업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이 소외되는 과정이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산업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된 노동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모델이 된 사회는 단순히 유럽의 초기 산업 사회가 아니라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대량 소비를 위한 대중 사회를 건설하는 미국의 근대 사회이다. 특별히 포드-테일러 시스템으로 불리는 대량 생산 시스템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노동자들의 애환을 탁월한 영상과 스토리로 구성한 영화이다.

2. 노동의 소외


마르크스는 '경제 철학 수고'에서 소외된 노동의 형태를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1)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2) 생산 활동인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 3)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4)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가 바로 그것들이다. '모던 타임즈'는 바로 이러한 소외된 노동의 여러 가지 형태들을 묘사하고 있다.


대량생산의 공정으로 이루어진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찰리는 하루 종일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나사못을 조이기를 하고 있다. 이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작업의 반복적로 말미암아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여버리는 '강박 관념‘에 빠지고 결국 정신이 이상해져서 급기야 정신병원까지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자신의 마음이나 정신을 표현하거나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대부분의 노동은 일차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노동의 과정은 생존 이상의 것, 즉 인간의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몸은 마음을 실현하는 도구이며, 인간 마음의 본질은 기계적이기보다 창의적이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변하고 몸은 그 변화에 다양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산업 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돈을 벌기 위한 임금노동으로 전락하면서 수렵 사회나 농경 사회와 달리 노동의 결과물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찰리는 자신이 공장에서 행한 노동 행위의 결과물인 제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이 바로 소외된 노동의 일차적 형태이다. 아울러 자신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기계적인 노동을 반복하게 되면서 또다시 인간의 본질적인 노동, 즉 창의적인 노동 혹은 전인적인 노동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 자체에서 소외이다.

3. 인간의 소외


노동의 소외는 곧 인간의 본질에서의 소외와 인간의 관계에서의 소외를 야기한다. 즉 내가 기계적인 노동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내가 생산한 생산물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면 될수록 인간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또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역시 대상화되고, 사물화 되어 인간 상실의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한 찰리는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가 본의 아니게 시위 군중에 휩싸여 주모자로 오인되어 감옥에 끌려가게 된다. 감옥 생활 끝에 풀려난 찰리는 조선소에서 일하지만 미완의 배를 진수시켜 버리고 선착장에서 빵을 훔친 예쁜 소녀와 함께 도망친다.


그러다가 강가에서 낡은 창고를 발견하곤 그곳에서 함께 살면서 직장을 다시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가 결국엔 다시 떠돌이로 남게 하지만 거리에 나선 찰리와 소녀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는다.


주인공이 시위대에 휩쓸려 주모자로 오인받는 장면은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인간의 소외 특히 노동자의 소외가 자신들의 의지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혁명가들은 자각적 주체로 동기화된 개인 혹은 단체이지만 이와 반대로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현실이 시대의 흐름 혹은 사회의 변화에 의해 전락된 피동적 객체임에 불과하다. 채플린의 영화가 혁명을 선동하는 사회주의 영화와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다.


그는 냉정하게 현실을 보여줄 뿐이지 거기에 대하여 직접 가치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 진영의 시각에서 보면 그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여줌으로써 암암리에 공산혁명을 부추기는 불순한 영화인으로 보여질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혁명적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단지 모순만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영화의 주제로만 사용한 영화 자본가로 폄하될 수도 있을 것이다.

4. 카우보이와 호보


19세기 미국에는 두 가지 형태의 이주 노동자 그룹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는 시골의 카우보이(목동)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의 호보(뜨내기 노동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로 말미암아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인 노동자 계급이 출현하고 그리고 그들이 결국 혁명의 주체가 되어 사회 변혁이 일어난다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미국 사회에서 카우보이와 호보는 혁명의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중산층으로 편입되거나 사회보장의 혜택으로 대중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채플린이 영화의 말미에 혁명의 메시지가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것은 자신을 성장시켜 준 미국 사회에 대한 신뢰와 애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성장한 자본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되면서 자본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를 능가하는 즉 돈이 돈을 버는 화폐금융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로 재편되었다. 세계 자체가 부국과 빈국으로 양분화되고 사회에도 양극화 형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연결된 로봇공학이 발전하면서 또 다른 빈곤층을 양산하며, 초기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경제적 양극화와 노동의 소외가 다른 차원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현대는 여전히 근대적 소외를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소외는 실존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의 차원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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