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
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196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는 기계 문명과 자본주의 발생의 원동력이었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모더니즘의 먼 근원은 이성적 세계관, 수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합리주의를 창출한 헬레니즘이었으며, 보다 가까운 근원은 르네상스로 인해 복권된 휴머니즘과 근대의 과학기술 그리고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서구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발 혹은 해체의 요구를 가지고 태동하였다. 따라서 모더니즘이 근대 서구 문명에 대해 낙관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가진 것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은 기계 문명 또는 산업 사회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비합리주의적 정서를 가지고 출발한다.
필립 K. 딕의 원작소설 <인조인간들은 전기 양을 꿈꾸는가?>를 영화로 옮긴 리들리 스콧 감독은 가까운 미래를 무대로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물음을 제기한다. 그는 보통 할리우드 영화에서 즐겨 사용하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진짜와 가짜, 원본과 복제품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주제를 통해서 새로운 영화적 사색을 시도한다.
서기 2020년 로스앤젤레스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하루종일 산성비가 내리고, 어둠 속에서 아시아 특히 일본 제품의 광고들이 현란한 조명을 쏟아내는 그런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리플리컨트 (Replicant)라 불리어지는 인조인간 중 자의식을 획득하고 스스로 생명 연장을 꾀하기 위해 위치를 이탈한 인조인간과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나선 인조인간 전문처리가 '블레이드 러너'인 덱커트 형사와의 대립과 투쟁이 이 영화의 주된 플롯을 형성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
이합 핫산(Ihab Hassa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정리한다. 불확실성 (Indeterminacy), 단편화(Fragmentation), 탈-경전화(Decanonization), 재현불가능성(Unrepresentability), 혼성모방(Hybridization), 대중주의(Populism), 행위(Performance)와 참여(Participation), 보편내재성 (Immensity).
산업 사회가 대중 사회로 변모하면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체제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생산될 물건에 대하여 하나의 규격이 정해지고 나면 그것을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복제품들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심지어 예술품마저 복제기술의 발달로 진품보다 더 진품 같은 상품들이 넘쳐나게 되고 결국엔 이러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서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이 출현하게 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세계가 일원화되면서 사회 변화의 변수가 더욱더 많아짐으로써 미래는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영역이 되었고, 인터넷의 등장으로 기존의 시공개념과는 전혀 다른 제3의 시공이 생겨났으며, 복제의 기술이 물질뿐만 아니라 생명의 영역까지 침범함으로써 신의 마지막 영역인 창조에 다가가는 현기증 나는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산업사회의 포스트모던적 특성과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라서 그런지 영화의 플롯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려는 메시지와 이미지는 아주 복합적이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 곳곳에 내재한 다양한 영상 혹은 음성 이미지들을 통해 위의 8가지 특성 이상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서두에 나오는 포스트모던적 이미지들을 세세히 살펴보면 보다 분명하게 감독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로스앤젤레스란 도시 자체가 후기 산업사회의 대표적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미래학자 아탈리가 상업주의 시대의 마지막 거점 도시로 부를 만큼 이 도시는 한 시대의 모든 특성들을 총괄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의 혼합, 고대 문명과 현대문명의 융합, 문명의 이기와 쓰레기들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암울한 미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현대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철학자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이다. 니체의 철학은 마르크스의 철학만큼이나 서구의 전통에 대하여 파괴적인 사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후의 2000년간의 서양 철학을 뭔가 잘못된 역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희랍의 합리주의와 근대의 이성주의 철학에 기인한 서구의 전통을 부정하면서 이제 그런 '서양의 신은 죽었다’고 설파한다.
나아가서 니체는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워지기 위해 신은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신이 사라지면 인간은 인간다워질 것인가? 인조인간 로이는 4년밖에 안 되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창조주인 타이렐 박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섭리는 변경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타이렐을 죽이고 만다. 하지만 곧이어 데커드를 죽음에서 구출하고 자신은 죽고 만다.
부친을 살해하고 원수를 구원하는 이런 모순적 이미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니체는 '즐거운 학문‘이란 책에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 우리 모두는 신의 살해자이다"라고 설파한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 신을 죽인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로이는 타이렐을 죽이고 생명 연장의 꿈을 포기한다.
로이는 니체의 논리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로이가 그것만으로 인간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울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죽이려던 데커드를 구하고 죽는 순간 진짜 보다 진짜인 복제품이 된 것이다. 감독이 전하려는 마지막 메시지는 영화 전체의 혼란된 이미지에 비해 아주 단순하다. 가장 인간적인 삶은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