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7

단풍나무

by 박종규


가끔 거실에서 잔디밭과 화단을 졸리는 눈으로 쳐다볼 때면 예상치 못한 야생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정원을 침입을 할 때가 있다. 물론 전원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약간의 공포를 수반한 경험이지만 그것의 실제는 야생의 흑묘(黑猫), 즉 올 블랙 컬러의 고양이 한 마리가 잔디밭을 거슬러 자신의 구역인 듯 순찰하고 돌아가는 모습이다.


고대에서 근대까지 인간에게 문명화란 일종의 도덕화이다. 반대로 반문명이란 야만적이란 뜻이다. 이쯤대면 문명과 야만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검은 고양이는 생태적으로는 원래 자기 구역일 수 있어도 법적으로 인간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내겐 고양잇과의 동물 중 가장 인간에게 가깝게 진화한 한 종류의 고양이를 나의 정원에서 감상할 권리도, 포획해서 가축화할 권리도 심지어 약용으로 도축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 원래 신이 주신 권리는 아니지만, 사실 신은 고양이 과의 포식자에는 인간-가축의 방어권만 주신 것 같다.


생존의 본능이 변질되어, 흡사 생존을 위한 성욕이 사디즘의 쾌락으로 변질한 것처럼 방어를 위한 무기가 파괴의 본능을 가진 인류에게 주어지면 그것은 공멸의 길잡이다.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칙 너머에 죽음의 원칙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IS의 테러가 난무한 이 시점에 그것은 소외된 인류의 또 다른 본능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고양이를 등장시킨 것은 아니다. 정원에서 가장 값비싼 품종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은 침실 옆의 적 단풍 한 그루이다. 유전자의 설계부터 좋은 품종으로 제작되어 심기어지기도, 관리되기도 충실하게 되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나무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정원의 문제는 이 고급 단풍 이외에 모든 나무나 풀 그리고 돌들은 별로 볼품없이 매도되어 왔고 관리되어 왔다는 점이다. 흑묘를 만드는 것은 단순하다. 러시안 블루 암놈과 샴 고양이 수놈을 붙이면 거의 블랙-키티가 양산된다.


적 단풍이나 청 단풍을 만드는 것은 이제 아주 쉬운 기술일 것이다. 인생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인생은 정원에 비유하기 어렵다. 정원을 가꿀수록 느끼는 한계이다. 종의 개량도 마찬가지이다. 공식에 따랐다고, 원칙에 따랐다고 결과가 내 인생 고유의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창작이던 사랑이던 육아이던, 심지어 수양이던 그것은 인간이 야생종을 오랫동안 길들어서 가축 군으로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리비도는 야성이다. 슈퍼에고는 규격화된 질서이다. 에고는 길들여진 가축이고 분열된 에고는 우리를 탈출한 야성일 것이다.


단풍나무의 붉은빛은 벚꽃나무의 분홍이 아니라 거의 노출될 피 색깔에 가까운 빛이었지만 대부분 군락을 지어 환경을 너무 적나라하게 도색하는 바람에 시의 소재가 되기보다 가요의 소재가 되어 버렸다.


야생 흑묘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나는 보다 문명화된 러시안 블루종의 고양이를 아파트로 사 왔고 결과는 처참했다. 8개월 살다가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다. 누구도 원하지 않은 사랑을 먼저 발견하고 아낌없이 퍼부었지만 사파이어 빛깔의 눈을 서서히 감고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다시 나는 붉디붉은 적 단풍나무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