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6

은행나무

by 박종규

우리 인생에서 가족이나 여타의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소수 겸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일을 강행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울 것이다. 이제 나의 정원의 중심인 은행나무 두 그루의 성장기를 전한다.


정원의 지리적 중심은 언젠가 초록일 잔디였지만 나의 정신적 중심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였다. 첫 번째 정원은 누가 보더라도 개인의 기호(嗜好)와 취향(趣向)에 따른 것이지만, 두 번째 정원은 나만의 고난(苦難)과 기원(祈願)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은행나무가 수억 년 간 생존한 최장의 관목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 이유로 은행을 심는 것은 순전히 조경업자의 지혜이자 상업적인 계산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은행은 그 열매 냄새의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뇌가 연산하는 ‘추억의 최적화’란 이유 때문이었다.


샛노란 잎들의 절정을 경험하려면 듀란듀란의 재결함 기념 런던 공연 중 ‘save the player'란 섹터를 보기 바란다. 대형 디스플레이 화면에 휘날리는 노란색 이파리들의 절경을 보면서 모바일 폰을 빛을 켠 관객들이 그 수많은 빛들을 모아 반응하는 것은 과히 경이적이다. 하지만 수 억 년간 진화한 샛노란 은행잎에 도대체 수 백 만년 동안 진화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다 알다시피 고향이나 타향에서 꿈을 못 이룬 플라톤이란 철학자가 죽은 이후 다시 플라톤이라고 불린 플로티노스란 학자가 있었다. 플라톤은 노란색의 이데아를 보고 죽었으나 플로티노스는 그 노란색이 은행잎으로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은행잎의 진노랑 빛을 좋아하는 이유는 듀란듀란의 공연 때문이 아니라 플로티노스 때문이었다. 더 깊이 이야기하면 그의 ‘유출설’이란 매혹적인 스토리텔링 때문이었다. 차면 넘친다. 넘치면 풍요롭다. 낙원의 스토리텔링.


나의 정원에 심은 은행나무는 아무리 가난해도 결국엔 넘쳤다. 유전정보는 기호화되고 도형화될 수 있지만 색채화 될 수 없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색채화에 성공했다. 벚꽃나무도 마찬가지였지만 은행나무는 더 강력하다.


그가 혹은 그녀가(추가: 정원에 은행나무 암수를 심었다)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보다 더 성장하고 성숙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생존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르쳐 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인류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그들 중 누군가 아니면 모두가 나에게 의미이다. 네팔 카트만두에 사는 소녀에서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진화론을 강의하는 생물학자라 하더라도 그는 신적 자연의 대리자일 수도 있고 은행나무 이상의 우주적 자연의 대변인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원 마니아도 아니고 동물 애호가도 아니다.


식물과 동물 안에 더 단순한 생명의 원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환원 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은 자연을 사랑한다. 하지만 자연의 나의 벗이 더 나아가 나의 사랑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정원 가꾸기에서 깨달은 것이 뭐냐고 물으면? 우리가 모르지만 우리가 탄 기차는 이미 다른 선로(線路)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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