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8

대나무

by 박종규

나의 마른 살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놀라운 뼈들이 CT(컴퓨터 단층촬영)만으로는 판정이 불가능해서 다시 MRI(자기 공명 영상)를 찍는 장치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내적으로 선명하게 인지된 이미지는 나의 뇌를 점유했던 신념/명령체계였던 영상과 언어 이미지, 예를 들면 수호천사라던가 찬송가의 구절이 아니라 서쪽 담장에 심어놓은 대나무 잎들이 바람에 부딪히거나 속대들의 겉 마디들이 자라는 소리였다.


소리나 굉음은 유기체의 살을 치지 않고 뼈를 친다. 그 이유는 뼈 속에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모든 물체는 물리학적으로 볼 때 내부가 거의 비어있다고 하지 않는가? 폭우(暴雨)는 나무의 잎을 적시지만 뇌성(雷聲)은 가지를 경직화시킨다. 뼈는 소리에 반응한다. 대나무가 비어있는 것은 소리에 유달리 반응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대나무는 악기가 된다.


별장이 있는 집에서 혼자 자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센 바람이 불 때 서쪽 창을 열어 놓으면 대나무 잎들의 스침이 때로는 스산하게, 때로는 평화롭게 들려온다. 대나무나 인생이나 무엇이 다른가? 나무나 우리의 인생이나 각자 심긴 자리에서, 향방 없이 부는 바람에 자라난 만큼 부대끼고, 한 줄기의 잎이 떨어지고, 속의 뿌리에 연결된 새로운 순들을 각자 만들려고 애쓰다가 수명을 다할 것이다.


정원을 꾸미려고 어렵게 얻었던 오죽(烏竹)이 죽은 것은 나에겐 다행이었다. 검은색은 매혹적이나 파괴적이다. 아직 나와 정원의 건강은 파괴적인 아름다움을 감당한 혼도 지력(地力)도 부족하다. 그래서 우연한 침입 이외에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검은색은 피하기로 했다. 서쪽의 대나무는 잔디처럼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초록이다.


초록을 의도적으로 사랑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생명의 대부분이 초록인 것을 우린 들 어떻게 하나. 푸른 대기와 초록 생명 그리고 붉은 인간, 이것이 우리가 아는 이 행성의 첫 번째 배색이다. 이렇게 보면 대지는 붉고, 대지를 주원료로 빗은 인간의 나신(裸身)도 붉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갓 태어난 인생을 적신(赤身)으로 부르는 것이다.


대나무 숲 군데군데에 야생 초피나무가 몇 그루 자란다는 것은 행운이다. 푸른 대나무 밭에는 가끔 초록 뱀들이 찾아온다고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초록 뱀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볼 때 시각적으로 느끼는 뱀의 충격에 못지않은 초피나무 몇 그루가 자라났다.


시각에 나타난 뱀처럼 초피는 처음에는 우리의 미각에 이질감을 주는 향료이지만 서서히 중독될 맛을 가졌다. 작은 정원에는 언젠가 내가 기다리는 초록 뱀도 찾아올 것이다. 갈색 뱀은 정말 안 왔으면 좋겠다. 독을 품었으니까. 하지만 야생이 인간을 이유 없이 공격하는 일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검은 야생고양이처럼 초피는 우연적으로 찾아와 우리의 삶을 미학적으로 변화시킨다.


대나무 때문에 MRI 검사도 의학적인 과정이 아니라 미학적인 과정이 되었다. 미학은 신학을 대중화한다. 하지만 세속화의 위험도 항상 존재한다. 내가 느꼈던 신적인 것들로부터의 축복은 세속화되고 학문화되면서 인간의 감성의 일부로 변질하였다.


동쪽은 늘 신성화되어왔다. 해가 신을 상징하였듯이. 하지만 서쪽은? 서쪽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도했을까? 탈-신화화되고, 탈-종교화된 지금의 세상에서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차라리 해 저물 서쪽이 아닐까? 다행히 나의 정원에 심긴 서쪽 담의 대나무는 마지막 신을 기다리는 듯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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