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원 10

가을

by 박종규


정원은 마음보다 몸에 우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살고 존재하는 우주가 일차적으로 우리의 신체와 접촉하는 우주이듯이, 사실 알고 보면 모든 것은 마음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희랍에서는 유물론자인 밀레토스 학파가 먼저 나오고 관념론자인 이오니아학파가 뒤를 따르는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우주를 기(물질 에너지)로 설명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이후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리(정신적 원리)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모든 생명의 배아나 자궁 내 존재들에게 의식, 더구나 자기의식은 너무나 사치일 것이다.


정원의 풀이나 꽃 그리고 나무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의 고민 대부분은 잉여적 진화이거나 아니면 초기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비난했던 부르주아적 사치일 뿐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탈출해 접시닦이로 연명하던 유대인 철학자 블로흐는 유럽에 남아있던 프로이트적 성애주의자들을 돈 많은 망상가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의식은 욕망에 수반된 것이고 욕망은 육체에 수반된 것이다. 그리고 육체는 정원이나 농원 혹은 신체나 생존과 관련된 어떤 노동에 종속된 것이다. 민들레 홀씨나 플라타너스의 씨앗들이 허공에 마구 흩날리는 것을 볼 때 당신은 무엇을 느끼는가? 자유를 해방을?


상상력이 풍부한 과거의 시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과학적 냉정함을 신봉하는 메마른 감성의 나는 유전자 코드에 종속된 유한자의 필연을 본다. 나의 정원에 대한 감성적 묘사가 없는 이유를 예민한 독자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정원에 가을이 왔다는 것을.


잔디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벌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가을은 왜 사색의 계절인가? 그 이유는 명확하다. 정원의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반응하고 행동해야 할 대상이 서서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실은 한편으로는 노동의 결실이자 동시에 죽음이다.


모기는 악어만큼이나 생존에 성공한 개체인 것 같다. 파리보다 오래 생존하고 또 어떨 때는 한 겨울 내에도 구석에서 숨어있으며 피를 빤다. 우리의 무딘 감각은 모기 덕분에 다시 반응하고 진화한다. 곤충류가 동면하는 정원은 거품 빠진 맥주와 비슷하다. 하지만 모기가 앵앵거리는 가을 정원의 밤은 북한의 핵 위협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는 한국과 같다.


컴퓨터 모니터의 이상한 불빛을 보고 궁금해하며 나의 무릎 위를 타고 올라오던 아비시니언 고양이가 결국 포기를 한다. 요크셔테리어 종 강아지도 정원으로 나가기를 포기했다. 동물은 포기가 빠르다. 사실 내가 보기에 모든 유기체의 본능은 알파고 이상의 지능이다.


확실히 우리는 지구 전체로 볼 때 비정상적이다. 500년 이내 지구를 탈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는 스티브 호킹의 예언은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나의 정원은 나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 때문에 망할 것만 같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우리의 단체-육체적인 감각이 단지 몇 천 년 간 축적되고 지식이나 발전한 집단 지성보다도 수 억 년을 거쳐 진화된 엄청나게 정교하고 지구 전체의 생존에 최적화된 최고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