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철학 12: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미완의 혁명

by 박종규

1. 남미와 체 게바라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발생지였던 영국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산업화와 민주화에 일찍 성공한 북미와 달리 남미는 산업화도 느리게 진행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민주화의 속도도 이주자들의 모국(스페인, 포르투갈)만큼이나 더디었다. 따라서 아름다운 자연과는 대조적으로 남아메리카는 대부분 빈부 간의 갈등, 권력 독점으로 인한 갈등, 인종 간의 갈등 등 무수히 많은 부조리를 안고 있는 대륙이었다.


대부분의 공산혁명이 선진 산업국가에서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농업국가(중국)나 초기 산업국가(러시아)에서 성공하였듯이 20세기 초반의 남미 역시 공산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청년 체게바라가 어떻게 혁명의 꿈을 가지게 되는가를 그의 남미 대륙 여행을 통해 추적한다.


아르헨티나의 의과대학 졸업반 학생인 23세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그의 친구이자 선배인 29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4개월간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 남미대륙을 횡단여행하는 결심 한다. 그라나도의 중고 모터사이클인 '포더(힘센 녀석)'를 둘이서 함께 타고 남미의 주령인 안데스 산맥을 가로질러 칠레 해안을 따라 사막을 건넌 후 아미로 가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이 젊은이들이 꿈꾸었던 여행도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텐트가 태풍에 날라고, 현지인들에게 오해를 받아 쫓겨나기도 하고 심지어 유일한 이동수단인 모터사이클마저 소떼들에게 부딪쳐 망가지면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고난 속으로 빠져든다. 결국 이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몸으로만 남미 대륙과 남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2. 청년들이 만난 부조리한 현실


독일의 사회철학자 마르쿠제는 의식화된 학생들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지만 혁명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젊은이들이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 모순의 원인이 잘못된 권력의 구조 혹은 사회 제도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사회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 누구보다 순수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물론 한쪽으로 편향되기 쉽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진 것이 없기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심 없이 투쟁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들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있다.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기록된 여행일지는 1951년 12월 코르도바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1952년 1월 빌라게셀, 미라마르, 네코체아, 바이아블랑카, 콜레코엘, 산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 산 카를로스 드 바릴로체에 이른다. 2월 14일 칠레의 테무코, 라우타로, 로스앙헬레스, 산티아고데, 발파라이소, 안토파가스타, 바케다노 아리카를 거쳐 3월 24일 페루의 타크나, 타라타, 푸노를 거쳐 티티카카호에서 배를 타고 줄리아카, 시쿠아니, 마추픽추유적을 둘러본 뒤, 우암보, 산라몬, 타르마, 리마, 푸칼파를 거쳐 아마존강의 지류인 우카얄리강을 따라 내려가 6월 1일 이퀴토스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 미국의 마이애미를 거쳐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기까지 약 8개월간의 대륙 여행은 게바라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적 현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정치적 이념으로 말미암아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몰리는 추끼까마따 광산에서의 경험이나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나환자촌 산빠블로에서의 경험 등은 남미의 한 상류층 젊은이로 하여금 지금까지 자신들이 알고 있던 현실과는 다른 세상의 부조리함에 점차 분노하게 한다.

3. 또 다른 여행의 시작, 혁명


의사가 된 지 2개월 만에 게바라는 의사의 길을 버리고 볼리비아로 가서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이 영화는 게바라의 남미 대륙 여행만을 다루고 있지만 이미 게바라가 남미의 혁명가로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후에 그의 젊은 시절을 집중적으로 그렸기에 사실상 여행 이후의 게바라의 행적은 영화 감상자가 탐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남미에 진출한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우파 군부의 쿠데타를 막후에서 지원하였는데, 미국과 미국에 지원을 받는 우파 정권이 바로 체 게바라와 같은 젊은 혁명가들이 투쟁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미국 기업의 소유인 경작지를 국유화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정책을 도입했던 과테말라의 아르베즈 정권을 CIA의 공작을 통해 무너트리면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권으로 대체시키는 데 성공한다.


1955년 여름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쿠바 출신의 혁명가 피엘 카스트로를 만나게 된다. 1959년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고 남미에서 최초로 공산혁명을 성공시킨다. 혁명의 성공 이후 게바라는 쿠바중앙은행의 총재로 재임하면서 사회주의 방식의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1965년 4월 게바라는 돌연히 쿠바에서 자취를 감추고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게릴라로 살아간다. 이미 성공한 혁명가였던 게바라는 정치가로서, 행정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다시 혁명가의 길을 떠난 것이다.


1967년 4월 볼리비아 정부군은 본격적인 게릴라 사냥을 시작한다. 같은 해 10월 2000명의 군인과 미국인 군관과 CIA 요원들을 투입한 볼리비아 정부는 결국 부상한 체 게바라를 체포하게 된다.


볼리비아 정부 관리와 CIA는 체 게바라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데 동의하고 총살시키고 만다. 1967년 10월 9일 아메리카 혁명에 일생을 바친 아르헨티나 출신 한 혁명가는 수많은 총알을 맞고 비참하게 죽는다.


CIA는 게바라의 죽음이 진실임을 보여주기 위해 두 손을 잘라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보낸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 코드로 다시 부활하여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는 저항문화 혹은 반문화의 시대적 아이콘로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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