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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 Sep 05. 2024

디카페인에 중독된 카페인 중독자

8년 직장생활 끝에 찾아온 달콤한 휴직 기록 6

오랜만에 혼자 카페에 들렀다. 평일이었는데도 낮시간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붐볐고, 커피 한잔을 시키려고 주문하는 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차례 앞사람들이 주문을 하고 물러나길 반복하고 이제 내 앞사람이 주문을 하기 시작한다. 40대쯤 돼 보이는 여성분이었는데,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아이스 2잔, 디카페인 라떼 아이스 2잔, 디카페인 따뜻한 아메리카노 1잔..."으로 시작하면서 6~7잔의 커피를 주문하셨다. 여러 잔을 주문해야 하는 상황이라 주문하는 사람도 주문을 받는 사람도 재차 확인을 여러 번 했고, 끝에 "모두 디카페인이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디카페인 아이스 라떼 1잔이요."라고 주문을 하였다. 주문이 길었지만 결국 모두 디카페인이었다. 


커피를 처음 마신 건 중학교 때쯤이었는데 그때부터 카페인 중독자의 생활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하게 고등학교 때보다 중학교 때 공부를 더 열심히 하였는데, 매일 독서실을 갈 때마다 레쓰비 캔커피나 프렌치카페 하나를 손에 쥐고 가야 불안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편의점 커피로 입시와의 싸움을 헤쳐나갔고, 대학교 때부터는 요즘 볼 수 있는 카페가 생기기 시작할 때쯤이라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 마셨다. 그리고 정점을 찍은 건 이탈리아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였다.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과 오후마다 커피를 마시는 이탈리아 문화에 저절로 녹아들었고, 슈퍼에서 4만 원 정도 돈을 주고 모카포트를 사서 집에서도 에스프레소를 매일 내려 먹었다. 교환학생은 약 8개월 정도였는데, 그때의 경험이 자양분이 되어 커피는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생필품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자취를 할 때에도 모카포트와 드립커피 도구로 매일 커피를 내려마셨고, 이상한 자존심으로 커피 맛에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 캡슐커피보다는 편의점 커피를, 편의점 커피보다는 저렴한 가격의 테이크아웃 전문점 커피를, 최종적으로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로스팅을 직접 하는 카페를 선호했다. 

회사에 출근할 때에도 텀블러에 에스프레소만 담아 가서 회사 탕비실에서 차가운 물이나 뜨거운 물을 부어 아메리카노로 오전을 버텼고, 가끔 일이 너무 하기 싫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에는 회사 주변 단골 카페에 들러서 달달한 커피나 라떼를 사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인 중독자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버렸다. 휴직을 하고 나서도 어느 때와 같이 모카포트로 집에서 커피를 내려마시곤 했었는데, 3-4일째 되던 날부터 밤을 뜬눈으로 보낼 때가 많아졌다. 회사에 출근할 때보다 활동량이 적어서 그런 건가 생각을 하고 넘겼는데 친언니와의 통화에서 언니가 얘기해 주었다. "그거 다 커피 때문이야." 미국에서 오랜 직장생활을 하다가 코로나 때 한국에 아예 들어오면서 언니도 2년 동안 쉬면서 이직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졌는데 그때의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회사에 다니지 않을 때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잔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처음에는 설마하고 넘겼는데, 커피를 마시지 않아 보니 정말 잠이 오는 거였다. 커피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커피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 혼자 뜬눈으로 보내야 하는 불면증의 밤은 너무나 지독하고 기분이 나빠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디카페인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어딜 가든 "디카페인 있나요?"라는 질문을 먼저 하게 되고, 조금이라도 맛있고 안전한 디카페인 원두를 찾아 헤맸다. 디카페인으로 추가금 없이 바꿔주는 카페는 반가웠고, 1,000원 추가금을 내야 하는 곳이더라도 눈물을 머금고 바꾸곤 했다. 근데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어느 카페에서나 디카페인 메뉴를 팔고 있었고, 실제 디카페인으로 주문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이 보였다. 한국은 인구수를 고려했을 때 카페가 제일 많은 나라라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 카페인 중독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여러 해동안 지속된 카페인 중독의 후유증으로 다들 디카페인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지. 


잠도 자고 싶고 커피도 마시고 싶은 아이러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디카페인이 있어서 다행인데, 그럼 나는 도대체 무엇에 중독된 것일까. 카페인에 중독된 것인지, 커피 맛에 중독된 것인지, 커피를 마시는 행동에 중독된 것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설마 이러다가 디카페인에도 중독되는 것은 아니겠지. 오늘도 디카페인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시는 카페인 중독자의 삶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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