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엄마와의 점심
회사를 '공식적으로' 그만둔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공식적으로' 그만두기 전에는 회사에 있는 육아휴직 제도를 사용했기 때문에 회사를 나가지 않은지는 이미 3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정말 철저하게 쉬는 데에 집중하다가 점차 28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하고 싶은데 하지 못했던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잘하고 있는 것 하나는 엄마와 일주일에 한 번 점심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때까지 제대로 못 했을까.
친정 엄마는 가까이 사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봐 달라고 부탁을 드리면서 같은 아파트 단지 또는 옆 단지에 살게 되었다. 첫째 때에는 다른 동네에 살고 계셨던 엄마 집에서 주중에 살면서 아이를 맡겼고, 둘째와 셋째 때에는 아예 우리집 근처로 이사를 오셔서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고 미술학원 다니는 것 등을 도와주셨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시간관리하면서 동네에서 해야 하는 일과는 알아서 다닐 수 있게 되고, 엄마도 나이가 드시면서 엄마는 슬그머니 도와주는 일을 놓으셨다. 셋의 일과를 챙기다가 그만두는 것은 아주 허전한 일이다. 나는 엄마가 모든 일과를 빠짐없이 챙기실 수 있도록 세 아이들의 일정을 요일별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엑셀로 정리해서 드렸었다. 표 한 장만 들고 있으면 지금 누가 어디에 가 있는지 볼 수 있는 거다.
엄마는 돋보기도 쓰지 않고 자잘하게 쓰인 글씨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미리 학교 앞에 가 있다가 아이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해 주시기도 하고, 미술 학원이나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주시기도 했다. 아이들은 학원에 많이 다니지 않는 편이었지만, 아이가 셋이고 서로 시간과 동선이 다르기 일쑤이기 때문에 나도 헷갈릴 정도인데, 엄마는 한 번도 펑크 내지 않고 성실하게 도와주셨다.
첫째가 올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지금 중3인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 넘게까지 도와주셨었으니, 그렇게 도움을 받았던 것이 10년은 족히 넘었다. 힘들지 않으시냐, 나는 힘든데 회사 그만둘까, 하고 여쭤보면, 다닐 수 있을 때 다닐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다니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봐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니라고. 젊어서 바깥일을 하신 적이 없는 엄마는 여자는 스스로 경제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며 내 등을 떠밀어 주셨다. 엄마가 그렇게 바쁘게 지원사격을 해 주신 덕에 나는 야근이 일쑤인 회사 일을 30년 가까이할 수 있었다.
한동안은 8시쯤 퇴근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재워주고, 깜박 잠들면 다시 일어나서 새벽에 몇 시간 더 일하다가 쪽잠을 자고 출근하는 일을 꽤나 오래 반복했던 기간이 있었다. 그다음에는 새벽같이 셔틀 타고 지방으로 출근해서 셔틀 타고 땡퇴근을 해도 아홉 시, 아이들 준비물 챙기고 말 몇 마디 나누면 아이들도 나도 쓰러져 자는 일정으로 몇 년 지냈다.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는 주중에만 부르다 보니 주말에는 피곤해도 집안일을 하다 보면 아이들 챙길 시간도 부족하고 쉬는 시간은 더더욱 후순위였다. 잠은 죽어서나 자게 되겠구나 하면서 버텼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내서 엄마와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마음 놓고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퇴근하고 집에 오면 엄마를 얼른 일에서 벗어나게 해 드릴 요량으로 서둘러 가시게 했고 주말에는 집안일로 정신을 못 차리니 따로 외식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그저 일 년에 명절이나 생신 등 특별한 날 몇 번을 챙겼을 뿐이었다.
주말마다 시댁에 가서 시부모님들과 식사를 한다는 동료 얘기를 들으면, 이렇게 가까이 사시는 친정 엄마도 못 챙기는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자주 챙겨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가끔 문안 인사를 하면, 엄마는 회사 다니랴, 아이들 챙기랴, 집안일하랴, 얼마나 힘드냐며 항상 나를 이해하고 응원하기만 하셨다. 한 번도 못 챙긴다고 타박하신 적이 없다. (시부모님은 생전에 지방에 계셨고 장시간 운전하는 거 위험하니 자주 오는 거 부담스럽다고 하셨었는데, 두 분이 몇 년 차이를 두고 돌아가신 지 벌써 몇 년이 된다.)
나는 퇴직하고서도 회사생활 했던 것이 무슨 유세인 양 떠벌이지만, 생각해 보니 엄마는 내가 그렇게 직장맘으로서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에 대해 그 노고를 알아달라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학교 앞에서 기다리면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와 "할머니~!" 하며 안기는 것이 이뻤다는 말씀만 자주 하신다. 손주들이 따르는 것이 이뻐서, 가끔은 투정도 하고 반항도 하고 맘 상하게 하는 언사를 했음에도 힘들고 거슬렸던 일들은 다 잊고 좋았던 기억만 이야기하신다.
복잡한 엑셀표를 보며 세 아이들 일정을 빠짐없이 챙기곤 하셨었지만, 집념과 의지가 강한 우리 엄마도 세월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한해 한해 몸이 쇠약해지고, 한 계절이 지날 때마다 하지 못하는 게 늘어나신다. 젊었을 때에는 운전도 하고 다니셨던 분인데, 이제는 TV 리모컨 조작도 어려워하신다. 엄마는 가끔 TV가 켜지지 않는다고 전화를 주신다. 가보면 리모컨에서 TV와 케이블 셋톱박스 전원을 같이 켤 수 있는 버튼을 두고, 각각 켤 수 있는 버튼 중 하나만 잘못 눌려서 그런 것이다. 하나씩 다시 켜보고, 두 가지를 한 번에 켜는 버튼으로 조작할 수 있도록 세팅해 드리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고 나면 엄마는 '역시 네 손이 약손이다!, '기계는 네 손을 거치면 다 고쳐진다'며 몇 번이고 감탄하고 고마워하신다.
재작년 겨울에는 몇 번을 넘어지셨다. 첫 번째 넘어지셨을 때에는 손으로 짚을 사이도 없이 앞으로 넘어졌다며 입안 쪽이 치아에 부딪혀 찢어지고 피멍이 들고 다리도 여기저기 꿰매야 할 정도로 상처가 심했었다. 꿰매는 것이 무섭고 싫다고 하셔서 바르고 먹는 약으로만 관리하며 회복을 하셨는데, 이상하게도 그 해에는 몇 번을 넘어지셨다. 이젠 자꾸 넘어지고 못 움직이시게 되는 건 아닌가 하여 그땐 걱정을 참 많이 했는데, 다행히 그 겨울 이후에는 넘어지시는 일이 없었다.
작년에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고관절이 아파서 한동안 잘 걷지 못하셨는데, 그게 다 나았는데도 걸음걸이는 원래만큼 돌아오지 않았다. 늙어서 아픈 거라며 병원도 소용없다고 안 가겠다고 하시는데, 뻑뻑해진 관절과 힘이 없는 근육은 계단은 물론 평지를 걷는 것도 기도하듯 한발 한발 천천히 디디며 안전을 확인하고 다음 발을 내딛도록 한다.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사드린 지팡이를 살살 내 짚으면서도 내 걸음에 10분이면 갈 거리를 이제는 30분 가까이 걸려서 힘들게 걸으셨다. 그런데 이것도 조금씩 회복이 되셔서 지금은 느리긴 해도 지팡이를 안 쓰고 걸으신다.
이삼 년 전에는 물론 이 정도로 힘들어하지는 않으셨다. 일주일에 한 번은 동사무소 문화센터에 그림을 배우러 가셨고, 한 번은 성당의 장수대학에 가셨으며, 일요일 미사는 빠지지 않고 참례하셨다. 둘 다 십분 이상 가야 하는 거리이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나와 식사하시는 것과 성당에 미사가시는 것, 장 보러 마트에 가시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바깥 활동을 하지 않으신다. 친구분들 만나시는 것도 일 년에 몇 번 나갈까 말까 할 정도이다.
당뇨, 고혈압 등 때문에 정기적으로 가시는 병원에도 이제는 내가 반드시 동행한다. 의사가 뭐라더냐 여쭤보면 한참 뜸을 들이시다가, '정확하게 생각이 안 나지. 내가 요즘 그래. 뭐 특별한 게 없었나봐.'라고 하시곤 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주의사항을 놓칠까 봐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따라가 보면, 다행히 아직은 엄마 말씀대로 특별한 게 없긴 하다. 지금까지처럼 당스파이크 오지 않도록 식생활 관리 잘하시라는 게 핵심이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고 하셔도 활동량과 대화량이 급격히 줄다 보니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 뉴스에서 같은 이슈를 며칠 동안 떠들어대면 그건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물으시는데, 설명을 좔좔해도 다음에 만날 때 또 물으시기도 한다. 뉴스에 나오는 이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서 그런 건지 내가 설명해 드린 게 이해가 안 가서 그런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근데 손주들 학년은 영 못 외우신다. 좀 익술해질 만하면 또 바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엄마는 시아버지, 즉 내 친할아버지에게 반찬을 해서 보내 드린 시기가 있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할아버지가 혼자 지내신 기간이 있었는데, 당시 서울에서 인천으로 출퇴근하셨던 아빠는 아침에 엄마가 스테인리스 그릇 여러 개에 담은 반찬을 챙겨드리면 출근하면서 사업장 근처에 사시는 할아버지에게 갖다 드리고, 빈 그릇은 가져오시는 식이었다.
누구를 위해 밥을 챙기고 시간을 챙기고 정성을 챙긴다는 것, 그것이 서로에 대한 관심이고 관계이다. 우리가 밥 한 번 같이 하자고 하는 인사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인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 시간을 낸다는 것은 그 시간을 위해 미리 일정을 조정하고 해야 할 일을 미리 하고 장소를 정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써야 가능한 것이다.
요즘 내가 매일 식구들을 위해 밥 세끼를 챙기고, 그러면서도 가까이에 사시는 엄마에게 한 그릇 따로 갖다 드리는 게 쉽지 않게 느껴진다. 매일 누구를 위해 따로 챙겨다 줄만큼의 메뉴를 맛도 양도 충분히 좋게 만드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걸 엄마는 몇 년을 하셨던 거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보다는 편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할머니 살아생전에는 할머니에게 꽉 잡혀서 숨소리도 죽여가며 사시던 할아버지가 혼자 사시면서 그 자유를 너무나 좋아하셨기 때문에, 죄송하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요즘은 내가 엄마에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아이들 챙기는 일에 집중하고 그동안 관심 있었던 분야 좀 들여다보면 하루가 훌쩍훌쩍 지나가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엄마와 충분히 음식과 시간을 나누려고 한다. 혼자서 집에서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시다가도 밖에서 기분전환 하자고 하면 소박한 메뉴도 진수성찬인 것처럼 즐겁게 잡수신다.
누구랑 같이 음식을 나누고 시간을 나눈다는 것, 이 단순한 일이 마음이 없으면 쉬운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다. 일할 땐 정보를 주고받고 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하면서 내가 살아남고 더 잘 나가기 위한 활동으로 하던 행위였는데, 늙으신 엄마와 매주 만나려고 하니, 완전히 다른 마음이 필요했다.
엄마는 나에게 한때는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던 대상이었고, 그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던 분이었고, 이제는 도움을 드려야 하는 분이 되었다. 때론 옛날이야기를 하고 또 하면서 조금이라도 엄마의 인지와 기억이 느리게 퇴화하길 바라고 거기에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때론 어제저녁에 뭐 드셨는지, 손주들이 몇 학년인지 기억하지 못하시는 걸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한다. 시끄러운 데에서는 잘 못 들으시기 때문에 목소리를 크게 하게 되는데, 사람이 이상한 게 목소리가 커지면 내용과 상관없이 짜증 게이지가 높아진다.
그러나 나는 짜증을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 그 점심 값은 엄마가 내시기 때문이다!
'내가 돈 쓸 일이 뭐가 있어. 이럴 때 써야지.' 하며 내신다. 명절이나 생신 등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나도 그러시라고 한다. 그리고는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실 때, 커피와 함께 나중에 잡수시라고 샌드위치를 사서 드리면 그걸 또 기쁘게 받으신다.
처음에는 내가 '이번 주말에도 만나서 같이 점심 먹어요.' 하면, 바쁘지 않냐며 조심스러워하시더니, 몇 달 지나자 그 시간을 기다리신다는 걸 숨기지 않으신다. 내가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전화하면 '우리 이번 일요일에도 만나지?'하고 먼저 물으신다. 만나서 하는 얘기는 늘 비슷한데, 헤어질 때 멘트 또한 십중팔구 이렇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고, 같이 밥 먹고 산책하니 기분 좋고, 나이 들었다고 거들떠도 안 볼 수 있는데, 같이 얘기해 주니 좋고.'
젊어서의 기세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늙어가는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좀 짠한 일이다. 그래도 옆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퇴직할 땐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막상 지내보니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과연 지금처럼 감당할 수 있었을까 싶은 것 첫 번째는 엄마와의 시간이다. 나에게는 보은의 시간.
그러게, 퇴직하길 잘했어! 백수 되길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