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은 이별이 아닌, 전쟁터였다.
아빠의 관이 천천히 땅속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차가운 황토색 흙이 삽으로 한 줌씩 퍼부어질 때마다,
세상도 우리 가족 위로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여섯 남매, 말없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둘러서 있었다.
막내는 겨우 일곱 살, 그 아이는 뭘 이해했을까.
엄마는 무너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 용서했는데… 이게 뭐야. 왜 죽은 거야…”
절규에 가까운 오열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알아봤다.
그 사람. 그날 우리 집에 찾아왔던, 그 남자.
“왜… 왜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내 안에서 무언가 터져 나오려는 찰나, 외삼촌이 먼저 움직였다.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네가 왜 여길 와!!!”
고함이 묘지의 적막을 찢었다.
아빠 쪽 큰아버지가 그를 끌고 왔다.
“이게 사람이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엄마 쪽, 외가와 친가가 묘지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욕설, 절규, 분노, 억울함이 뒤엉켰다.
아빠는 아직 완전히 묻히지도 않았는데,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이 광경이…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가족은, 때로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이름이라는 걸.
그리고 그날, 우리는 모든 걸 끝냈다.
누군가는 차를 돌렸고, 누군가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왜 그렇게까지 우리 엄마에게, 우리 가족에게 그랬을까.
아빠는 다섯 형제 중 넷째였지만, 형제 중 가장 안정된 삶을 살았다.
집도 넉넉한 편이었고, 할아버지와 고모도 함께 우리 집에서 지내셨다.
엄마는 정말 정성껏 시댁 식구들을 모셨다.
할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모시고, 고모한테도 참 잘하셨다.
우리 집엔 늘 친척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엄마는 올 때마다 뭐든 정갈하게 차려내며 대접했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그 아이의 존재가 드러난 뒤,
할아버지는 조용히 짐을 싸서 큰집으로 가셨다.
“여기 있을 수 없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할아버지는 절대 그 애를 데리고 오면 안된다고 하셨단다.
진아엄마를 생각하면, 절대 그러면 안된다고..
도대체 왜?
왜 그렇게 엄마에게 등을 돌린 걸까.
우리가 잘 살아서, 화목해서… 그게 배 아팠던 걸까.
나는 지금도 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차를 나눠 타고 떠났고
아빠 쪽 친척들과의 인연은 완전히 끊겼다.
그 사건은 내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그들에 대한 원망, 억울함, 분노.
“그들은 아빠를 죽인 사람들이야. 나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또한 이 분노의 중심에는 그 남자애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 대학에 들어가서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내 눈에 보였던 그 남자, 모든 불행의 시작인 그 사람.
그때 그 아이가 지금의 내 나이었겠구나.
갑자기 이상했다. 이렇게 어렸었나.
그 애가 지금 이 나이의 모습으로 아빠를 찾아왔던 건가.
그 애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내가 그렇게까지 미워했을까.
세상에 태어난 죄밖에 없는데,
우리는 적어도 그래도 아빠품에서 사랑과 행복이라는 감정을 안고 자랐는데
그 애는... 그조차 없었던, 가여운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은 혼란스러웠다.
나를 지탱하게 했던 그 분노가
사실은 내가 조금... 잘못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중에 건너 건너 들었다.
그가 40세 즈음, 외국에 나가 일하다가 죽었다는 얘기를..
사우디였던가, 어느 공사 현장이었는지
이모가 슬쩍 말하듯 꺼낸 이야기였다.
한 번도 불러본 적도, 아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오빠'였다.
세월이 흘러 나이 들어가면서
그 가엾은 사람의 기억을 이제는 더 이상 분노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는.. 불쌍했던 인생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외롭고 슬픈 인생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여운 사람.. 불쌍했던 인생..
그를 위해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