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탓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요즘 애들

by 지금

아이의 마음을 가진 어른은 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아이의 시절을 지내온 어른은 아이를 책잡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걷는 어른은 아이를 폄하하지 않는다.

때로는 탐욕에 찌든 어른의 옷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 곁에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이라는 인격체와 마주하는 길이고 욕망의 투영 없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길이다.




요즘 애들


“요즘‘애들’왜 그러죠?”

“정말 이해하기 힘들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세월을 넘어 선생들이 입에 달고 사는 이야기다.

그러나‘요즘 애들’은 요즘 처음 등장한 세대가 아니다. 늘 있어왔다. 그리고‘요즘 애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걱정거리였다. 일리아스에서도 요즘 젊은이들의 나약함을 지적했고, 14세기 프란체스코회 사제였던 알바루스 펠라기우스(Alvarus Pelagius,1280~1352)도 요즘 애들은 답이 없다며 한탄했다. 한비자도 스승이 가르쳐도 변할 줄을 모른다며 하소연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다며 못마땅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세월이 변해도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인의 시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요즘 애들’은 시대, 상황이 만드는 것 아닐까, 그리고 시대와 상황은 기성인의 작품이 아닌지, 결국 요즘 애들은 어른의 작품이 아닐까. 요즘 애들을 넣어 둔 공간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환경이, 그들에게 부여되는 과제가, 그들에 대한 요구가, 그들에 대한 기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어른의 대우가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가치관과 관점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탓하려면 요즘 어른을 탓하는 것이 순서일 테다.

아이에 대한 어른의 요구는 정당한지, 아이에 대한 어른의 기대는 옳은지, 아이에 대한 어른의 과제는 적당한지, 아이에 대한 어른의 평가는 공정한지, 아이에 대한 어른의 환경은 윤리적인지, 아이에 대한 어른의 대우는 인간적인지 말이다.


“요즘‘어른’왜 그러죠?”

“정말 이해하기 힘들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교정을 원한다면 ‘요즘 어른’부터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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