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다니는 아이
아이의 삶은
아이에게 맡겨야 한다.
아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아이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이쪽저쪽을 외치지 마라.
해라, 하지 마라 지시하고 통제하지 마라.
그것은 아이의 삶을 훼손하는 일이며, 달려가는 아이 앞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일이다.
어른의 자리는 아이 앞이 아니라 아이의 뒤이다.
아이 앞에서 펼치고 휘둘렀던 손가락을 접자. 그리고 아이가 가리키는 그곳을 바라보자.
그리고 아이의 선택을 인정하고 칭찬하자. 손뼉 치고 환호하자.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삶에 콩 놔라 팥 놔라 간섭하는 것은 아이의 삶을 찌그러뜨리고 망가뜨리는 일이다.
끌려다니는 아이
복도 옆 작은 의자에 동그랗게 말린 몸이 얹혀 있다. 소영이다.
무슨 일이냐는 눈빛에 소영은 작은 손을 펼쳤다. 대여섯 조각으로 접힌 종이 쪽을 펼치자 소영이에게 주어진 과제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깨알같이 박혀 있는 과제마다 소영이의 한숨이 한 움큼씩 묻어있다.
교육은 아이의 요구에 대한 어른의 응답이다.
그러나 요구와 응답의 주체가 바뀌었다. 어른의 요구에 아이가 응답한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서는 순간까지 어른의 요구는 쉼이 없다. “해라”,“하지 마라” 매일, 매시간 어른의 요구가 쏟아진다.
어른의 요구 앞에 아이의 요구는 침묵한다. 듣기만 할 뿐 말이 없다. 움직이지만 생각은 멎는다. 그냥 듣고 그냥 움직인다. 어른의 요구에 대한 의미도, 가치도, 이유도 모른다. 갑자기 만난 소나기 대하듯 지나가기만 바랄 뿐이다.
어른의 요구가 지난 자리는 황량하다. 그 무엇도 자라지 않는다. 각자의 특성에 대한 배려 없는 일방적 요구는 아이의 요구마저 잠들게 만든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필요한지,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어른의 요구에 이끌린 지 십수 년 아이들의 눈과 귀는 막혔고 팔다리는 힘을 잃었다.
요구의 주체가 바뀔 때 교육은 왜곡된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시험을 치고, 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입학을 앞둔 아이들의 소리다. 그 학교에 가는 것도, 전공을 택한 것도, 졸업한 이후에 대해서도, 이유를 모르고 길을 모른다. 이곳이 어디인지, 이곳이 무슨 소용인지, 왜 이곳이어야 하는지, 이곳이 어떤 의미인지, 이곳 다음은 어디인지...., 아이의 삶임에도 아이의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다.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의혹을 품는 것은 심각한 실존적 문제이다.
이것이 아이에게 자신의 삶을 요구할 기회가 필요한 이유이다.
끌려온 삶의 최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