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교육
목수는 나무에 대해 능합니다.
나무의 성질을 꿰뚫고 그 성질에 걸맞은 가구를 만듭니다.
대장장이는 쇠에 대해 탁월한 재주가 있습니다.
쇠의 성질을 꿰뚫고 그 성질에 걸맞은 기구를 만듭니다.
나무에 대해 모르면 목수일 수 없고 쇠에 대해 무지하면 대장장이일 수 없습니다. 나무를 잘 아는 목수나 쇠를 잘 아는 대장장이라면 그 나무와 쇠의 가치를 높이고 만들어진 기구에 선한 의미를 입힙니다. 그러나 나무를 모르고 쇠에 대해 무지한 목수나 대장장이는 나무와 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결국 그 쓸모를 잃게 합니다.
교육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사는 아이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아이를 알아야 그 아이만의 색과 향을 풍기고 그만의 멋을 지닌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나무를 모르는 목수가 나무를 버리고 쇠를 모르는 대장장이가 쇠를 망가뜨리듯 아이를 모른 채 이루어지는 교육은 그 아이 만의 색과 향을 잃게 합니다.
눈앞에 앉아있는 아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이 앞에 서는 일은 교육일 수 없습니다. 교사는 그냥 지식소매상일 뿐이고 아이는 필요한 지식을 구매하는 소비자일 뿐 이니까요.
거짓 교육
생각만큼 아이들을 잘 모른다.
겨우 그때그때 성적이나, 언젠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만 마음 이곳저곳에 엉기성기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느 날 투두둑 투두둑 둔탁한 떨림 끝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았다. 몇 년도에 졸업한 누구라며 인사를 건네는데,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10분여 이야기를 듣고서야 어렴풋이 옛일이 깨어났다. 20여 년 전 이야기다. 그것도 겨우 찾아낸 작고 부서진 조각 기억이다. 선생으로 기억해 준 아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수천 명의 아이를 어떻게?”
동료들의 위로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무겁다.
그러면서도 오늘도 여전히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 서 있다. 아이들의 꿈이나 마음속 굴곡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름조차 모른 채 그들 앞에서 웃고 떠들고 기웃댄다. 무슨 떠돌이 약장수도 아니고, 선생의 도리가 아니다.
생각도, 욕구도, 관점도, 희망도, 능력도 모른 채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모른 채 이루어지는 교육은 헛된 일이고, 거짓 교육이다. 아이들을 알아야 한다. 교과서를 펼치기 전에 서로의 마음을 먼저 펼쳐야 한다. 선생이 먼저 진솔하게 마음을 드러내야 한다. 마음이 교류할 수 있는 물꼬를 터야 한다. 그리고 교류에 멈춤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작은 물꼬는 점점 넓어져 서로에 대한 앎은 풍성해진다. 아이를 알아야 그들의 마음이 동하고 시선이 모이고 귀가 열린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 앞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훌륭한 방법으로 제시해도 무소용이다. 이것이 아이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 앞에서 교육을 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