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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쓸 만하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이제 그만 쉬랍니다

by 지금

쉼은

일을 잠시 멈추는 일이다.

멈춤은 더 나은 일을 위한 준비다.


쉼을 기다리고 쉼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다.


그러나

일 없는 쉼은 강제 멈춤이다.

강요된 멈춤은 고통이다.


쉼은

늘 미래에서 빛난다.

피곤에 취해, 삶의 치열함에 취해 쓰러질 일을 감싼다.


쉼은 건강하고 의욕적인 미래를 바라는 소박한 다짐이다.


그러나

내일이 없는 쉼은 미래에 대한 유예조치다.

미래에 대한 유예는 불안이다.


쉼은 일과 일 사이에 머물 때 비로소 쉼이 된다.





이제 그만 쉬랍니다


쉬랍니다.

할 일이 없다고.


이제 일에서 손을 떼랍니다.

더 이익이 되는 손이 있다고.


이제 비켜서랍니다.

자리 임자가 있다고.


쉼은 좋은 일입니다.


노동에 지친 손과 발을 편안케 하고

눈과 귀를 다독이며


노심초사 불안에 시달린 마음을 위로하고

온갖 군상의 요구에 기진한 머리를 안아주는 일이니까.





그러나 언제부턴가 쉼이 아픔이 되었습니다.

지친 삶에 대한 보상인 쉼이 오히려 삶을 지치게 합니다.


쉬라는 명은 가슴을 정통으로 조준하여 타격합니다.

쉼은 모호한 두려움을 안깁니다.


쉬라는 말은 ‘쓸모없다’라는 뜻이니까요.


일은 하루하루를 허무에서 건져내고 삶에 대한 열정을 지켜줍니다.

비록 나이가 하얗게 세었어도 심장이 새것처럼 박동하고 생의 활력이 넘치는 건 존재를 기뻐하고 쓸모를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손을 떼라는 명은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고 소소하게 마음을 써주는 존재로부터도 멀어짐을 말합니다.


쉼은 득이 되지 않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강요된 의무입니다.

쉼의 의무는 일의 의지나 행위에 부과되는 구속입니다.





일에 대한 절박한 필요를 쉼 없이 이어지는 쉼을 통해 깨닫습니다.

일의 필요는 끝없이 이어지는 쉼을 통해 더욱 공고해집니다.

쉼은 언제나 위협적입니다.

내일을 갉고 모레를 흩트립니다.

내일은 쉼의 야만이 사라질 때 비로소 가능할 테니까.


그러나

세상은 이익이 큰 손을 찾습니다.


이보다 참담한 일이 또 있을까.


“난 아직 쓸만한데….”

그 누구도 귀에 담지 않는 자신만의 외로운 생각일 뿐입니다.


좋아했던 일터에서 이제 당신은 쓸모를 다했다며 떠남을 요구받는 일은 참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라고

다른 건 문제 될 게 없다고

노년의 삶은 여행을 하고 뭔가를 배울 기회라고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고

꿈꿔왔던 뭔가를 해내고

삶의 가치를 타인에게 전할 기회라고

일에서 손을 털라는 건 지치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는 신성한 허락이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새로운 기대를 안기는 일이라고

그러니 재앙이 아니라 승리한 것처럼 여길 수 있다고.


그러나 아무리 그럴 수 있다고 다독여도 한숨이 앞서는 건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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