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삶에
봄이 오지 않는 건

차가운 3월

by 지금

매 순간을 삶의 완성으로 여기며 살아라.

생을 귀한 재화처럼 아끼되 지금 당장을 누려라.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전하는 삶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하고 열정적이다.

세상을 처음 마주하듯 경탄하고 마지막인 듯 절실하게 사랑하라는 그의 통찰은 생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하지만 이 찬란한 격언들도 교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무력해진다. 아무리 근사한 철학일지라도 아이들이 처한 현실과 만나는 순간 서리 맞은 풀잎처럼 땅바닥에 맥없이 드러눕는다. 오늘을 누리라는 그 달콤한 권유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유예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냉혹한 일상 앞에서는 결국 공허한 메아리로 흩어질 뿐이다.




차가운 3월


3월의 학교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일렁인다. 교실마다 생경한 활기가 북적이고 아이들의 입가에는 분홍빛 미소가 번진다. 새 학년, 새 교실, 새 친구, 새 교과서, 선생님까지. 모든 풍경이 처음 마주하는 선물 같기에 3월은 첫 페이지의 떨림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계절이다.


그러나 이 눈부신 환희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촘촘하게 짜인 입시 시간표가 아이들의 해맑은 이목구비를 하나 둘 옭아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 이제 몇 개월만 지나면 ‘납품’이네.”


찬란한 계절이 막 기지개를 켜는 그때 유은은 도서관 앞 의자에 몸을 던지며 3월의 따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갑고 무거운 비명을 질렀다. 유은에게는 더 이상 봄, 여름, 가을 같은 계절의 낭만은 없다. 3월 6월 9월이라는 세월의 마디도 무의미했다. 모든 계절이‘입시철’이고 모든 달이‘입시달’ 일뿐이었다. 도처에 널린 입시 시간표를 따라 기계처럼 걷고 뛰는 것 그것이 유은이 마주한 유일한 일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유은에게 3월은 새 생명이 돋아나는 축제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12년간 타인의 기준에 맞춰 정교하게 사육된 자신을, 다시 누군가의 구미에 맞게 포장해 시장에 내놓아야 할 ‘출하의 시기’를 알리는 잔혹한 신호였다.


가장 눈부신 꿈으로 가득해야 할 열아홉. 더 가치 있는 삶을 갈망할수록 눈앞의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로 변해갔다. 교정에는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건만, 유은의 가슴속엔 여전히 날카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유였다. 창밖에는 완연한 봄볕이 봄날의 선물처럼 쏟아지고 있었지만, 유은의 책상 위로 떨어지는 햇살만은 온기 없이 그저 눈이 시리도록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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