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아이’에게서 ‘저 아이’를 찾는가?
그 많던 흥은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즐거움은 또 어디로 갔을까?
언젠가부터 그들의 즐거움과 흥미는 단단히 묶여 고정되었고 그들의 생각과 가치는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그러다 종내는 버려졌다.
그리고 '저 아이처럼 살아가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자신을 버리고 그 누구를 닮아야만 하는 것 그것이 아이들의 생존조건이다.
왜, ‘이 아이’에게서 ‘저 아이’를 찾는가?
입만 열면 ‘저 아이’를 보라며 욱지르는 선생
눈만 뜨면 ‘저 아이’를 들먹이며 같기를 강요하는 선생
‘너’를 지우고 그 자리에 ‘저 아이’를 강권하는 선생,
“너는 왜?” ‘저 아이’ 같지 않냐는 질책에 아이들은 지친다.
이 아이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를 찾지 마라.
이 아이는 ‘이 아이’이고, 저 아이는 ‘저 아이’ 일뿐이다.
이 아이에게서 다른 누군가를 기대하지 마라.
왜
이 아이에게서 ‘저 아이’를 찾는가?
이 아이를 버리라 요구하는가?
이 아이에게 ‘저 아이’를 요구하는가?
왜
이 아이를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가?
시기심을 부추기고 관계를 더럽히는가?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하고 분노를 키우는가?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무식이며, 흉내 내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19세기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의 이야기다. 이 아이로, 이 아이 모습 그대로 자라도록 돌보는 일, 그것이 교육이다.
아이는 누구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 지닌 특별한 능력을 구현하고 있다.
'저 아이'를 들이밀며 이 아이가 지닌 특성을 파괴하는 일보다 무엇이 더 인간 파괴적이겠는가?
이 아이에게 저 아이를 요구하는 것은 이 아이의 가치를 부인하고, 이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며, 한 인간을 파괴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