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억센 마음
쫄면 탓은 아닐는지

아내의 쫄면 사랑은 유별나다

by 지금

아내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움직일 필요가 생기면 곧바로 집을 나섭니다.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바람도 아내의 걸음을 막지 못합니다.


일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장애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아내에겐 오후, 내일, 다음이 없습니다.

나약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내는 몸을 사리는 통상의 조건을 보란 듯이 무시합니다.

조심하라는 권고를 여리고 약한 존재로 만드는 주문쯤으로 치부합니다.

기성 질서에 반항하는 청소년을 닮았습니다.


무르고, 가냘프고, 연하고, 부드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언제 이렇게 단단하고, 거칠고, 굵직하고, 뻣뻣해졌는지….





음식이 성품을 만든다던데….


아내의 최애 음식인 쫄면이 아내의 가슴에 쇠심줄을 박은 것은 아닐까요?


나약한 남편 때문이라는 주변의 시선을 쫄면 탓으로 슬쩍 돌려봅니다.





아내의 쫄면 사랑은 유별나다


아내는 쫄면을 좋아합니다.


아내의 쫄면 사랑은 지극합니다. 냉장고는 언제나 아내의 청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 아내의 머릿속은 울긋불긋 새콤달콤 새로운 레시피 개발로 늘 시끌시끌합니다. 그러다 이거다 싶은 레시피가 떠오르면 주변의 의사와는 아랑곳없이 온갖 구실을 내세워 면을 삶기 시작합니다.


입맛이 없다며 삶고 뭘 해 먹어야 될지 모르겠다며 삶습니다. 맑은 날이면 연분홍빛 면발이 파란 하늘과 어울린다며 삶고 비가 오면 빗소리 들으며 먹으면 제격이라며 삶습니다. 더운 날엔 매운 음식이 어울린다며 삶고 추운 날엔 추위를 잠재우는데 이만한 것 없다며 삶습니다.


쫄면 타령은 집을 나서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어딜 가든 아내는 쫄면을 찾습니다. 한껏 치장한 음식이 아무리 화려한 몸짓으로 손짓해도 아내는 끔쩍도 않습니다. 오직 쫄면만 쫓습니다. 온 동네를 달구는 이름난 맛집도 아내에겐 볼일 없는 집이고, 아무리 많은 이들이 핏대를 세워가며 찬양하는 음식도 아내에겐 별것 아닌 음식입니다.


화려한 간판에 가리고 찾는 발길이 뜸하고 큰집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 후미진 곳 구석집일지라도 쫄면이라는 간판만 보이면 아내는 직진입니다. 아내는 이것저것 볼 것도 가릴 것도 없습니다. 앉기도 전에 그냥 곱빼기를 외칩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수저를 차리고 손을 비비며 들뜬 마음으로 쫄면을 기다립니다.


아내의 관심은 오직 쫄면입니다. 눈은 주방에 들렀다가 그릇을 나르는 종업원의 발길로 이어지고 다시 계산대로 갔다가 후루룩 소리를 따라 옆 테이블로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리고 주문이 빠른 옆 테이블로 전해지는 면 그릇을 부러운 눈길로 쫓습니다.


몇 번을 헛물켜던 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종업원의 발길을 보자 이내 빛을 발합니다. 쫄깃을 넘어 억센 면발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쫄면을 영접한 아내는 면 그릇을 포근히 감싸 안고 머리칼 쓸어내리듯 면발 한 올 한 올에 정성을 다합니다. 수년 만에 만난 고향 친구가 이보다 반가울까요.


아내는 푸르고, 붉고, 희고, 노란 푸성귀와 빨간 고추장 그리고 면을 이리저리 젓고 돌리고 뒤집고 벌리고 들고 눕히면서 서로 간의 어울림을 강요합니다. 긴장한 채 따로따로 뭉쳐있던 푸성귀와 고추장과 면발은 서로의 거리를 좁힙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희고 노랗고 푸르던 푸성귀와 면발은 빨갛게 상기되고 아내의 얼굴은 가을 석양의 연분홍빛으로 물듭니다.


나는 쫄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내의 요구를 거스를 수 없어 그냥 따를 뿐입니다. 결국 원치 않는 발길을 한 나는 쫄면 아래에 깔린 빛바랜 서브 메뉴를 택합니다. 김밥 때론 라면 운이라도 좋은 날이면 칼국수 맛을 보기도 합니다. 아내의 입이 뻘겋게 물들어가는 동안 내 가슴은 뻘겋게 상기됩니다.


아내 앞에 놓인 쫄면은 금세 사라집니다. 한 그릇이 그것도 곱빼기가 젓가락 몇 번에 흔적을 감춥니다. 그렇게 뚝딱 해치우고도 아내는 언제나 아쉬운 입맛을 다십니다. 단무지는 물론 젓가락 끝에 묻어 있는 작은 깨 한 톨까지 훑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다음을 기약하며 쫄면집을 나섭니다.




무엇이 아내의 마음에 억센 힘줄을 박았을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쫄면에게 슬며시 책임을 떠넘깁니다.


음식을 먹으면 몸 안에서 그 음식이 지닌 특성을 닮으려고 하는 작용이 일어난다는 누군가의 말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남편 때문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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