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하루
시간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집니다.
누군가의 손에 주어지는 순간부터 시간의 가치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시간의 가치는 0부터 무한대까지 벌어집니다.
시간의 가치는 사람이 만듭니다.
시간의 가치는 사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시간의 가치가 클수록 삶이 윤택하고 시간의 가치가 빛날수록 삶이 즐겁습니다.
아내의 하루
‘딸그락 달그락’
‘탁탁 탁탁 썩 썩 썩 썩’
아침이면 으레 아내표 알람이 울립니다.
알람이 울리면 두려움이 발끝을 타고 무릎을 지나 가슴을 누르며 스멀스멀 기어오릅니다. 하나의 소리가 멎으면 또 다른 소리가 잇습니다. 거기에 아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거칠고 냉한 바람소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공포로 바뀝니다.
결국 침대와 아쉬운 안녕을 고하고 구겨진 몸뚱이를 질질 끌며 방문을 엽니다. 그리곤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아내의 동정을 구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몸으로 하소연합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부름에 신속하게 응했음을 서둘러 아내에게 고합니다.
아내의 눈꼬리가 내려가고 날카로움이 가시면 그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아아 으’
희망에 찬 아침의 김을 빼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며 하품으로 게으른 자의 새날맞이 의식을 치를라치면 아내의 손가락은 어김없이 세면장을 가리킵니다. 게으름을 멈추고 얼른 씻으라는 무언의 압박입니다.
거부하는 몸뚱이를 달래서 쏟아지는 물줄기 속으로 들이밉니다. 그러나 몸뚱이는 여전히 한밤입니다. 눈꺼풀을 뒤집어쓴 눈자위는 자취가 없고, 팔다리는 명을 다한 오징어처럼 축 늘어졌습니다.
처진 몸을 끌어다 식탁 의자에 걸칩니다. 그러면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오늘의 할 일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합니다.
오전 9시에 병원 봉사활동 가야 하고, 11시엔 정우엄마와 만나기로 했고, 1시엔 형님들과 점심 약속 있고, 오후 3시엔 영희와 시장가기로 했고, 저녁 6시엔 아이들 글 봐주기로 했고…. 별로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건만 아내는 아침을 먹는 내내 자신의 오늘 일과를 시시콜콜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다시 오늘의 일을 반복합니다. 저녁 밥상은 으레 오늘 아내의 일 차지가 됩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그때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묻지도 않는 말, 궁금하지도 않은 말을 쉼 없이 늘어놓습니다.
언제부턴가 식사 시간은 아내의 할 일과 한 일을 듣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사실 아내의 오늘에 관심이 없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작은 흥미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아내의 입은 쉬지 않습니다. 아내는 나의 관심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신의 일과 일에 대한 생각만을 남김없이 꺼냅니다. 등장인물도 수명이고 사건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아내가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시간을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의 삶을 귀하게 여기는 아내가 부럽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 땀 흘리고 그곳에서 만난 누군가를 대하는 따뜻한 마음이 부럽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용할 시간에 대한 아침 이야기는 주어진 시간에 가치를 더하겠다는 다짐이고, 사용한 시간에 대한 저녁 이야기는 풍부해진 삶의 곳간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시간에 대한 아내의 관심과 애정은 시간을 베풀어 준 이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감사의 표현 같습니다. 의미 있는 오늘이 일생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려는 의지로도 읽힙니다.
시간을 대하는 아내의 태도가 부럽습니다.
시간을 꾸미고 가꾸는 아내의 삶이 부럽습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고맙습니다.
당신은?
이라며 나의 24시간을 묻지 않는,
그리고 자신의 시간만을 바라보는 아내가 섭섭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