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새겨진 세월의 흔적
풍성하던 머리칼은 비 맞은 깃털처럼 눌러앉았고
까맣게 반짝이던 머리칼은 바람에 날려 휑한 민들레 풀씨를 닮았습니다.
맑고 투명하던 피부는 먼지 낀 창문처럼 흐릿해졌고
통통하던 볼살엔 주름이 한가득입니다.
보드랍던 손거죽은 거칠기가 소나무 꺼풀 같고
미끈하던 목엔 병장을 뛰어넘는 계급장이 걸렸습니다.
아내는 틈만 나면 문지르고 두드리고 칠하고 그립니다.
세월로 무너진 몸을 구석구석 손봅니다.
집을 나설 때마다 보수공사로 분주합니다.
옷을 입을 때마다 허릿살을 짓누르며 단추와 씨름하고, 뱃살을 움켜쥐고 지퍼와 겨룹니다.
자연에 순응한 몸뚱이는 외모를 중시하는 나라에선 근본적으로 거부되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 새겨진 세월의 흔적
아내는 먹는 것을 즐깁니다.
먹는 것만 눈에 띄면 이목구비는 체면을 버리고 품위쯤은 가볍게 건너뜁니다.
전형적인 잡식입맛 없어서 못 먹는 타입입니다.
먹을 것을 대하는 아내를 보면 세상 그처럼 진심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체중이 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면서 먹는 것이 괴로움이 되었습니다. 슈퍼만 가면 화색이 돌고 손바닥을 비비며 반기던 먹거리도 고통을 안기는 적이 되었습니다.
쇼핑 모습도 바뀌었습니다. 커다란 카트는 작은 바구니로 바뀌었고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뻔질나게 드나들던 정육 코너도 그냥 지나치기 일쑵니다. 내일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언제나 커다란 바구니를 가득 채우던 장보기가 이젠 작은 봉지 하나면 족합니다.
식사도 하루에 두 끼로 줄였습니다. 아내는 저녁이라는 말을 지웠습니다. 점심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결심은 굳었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던 족발 앞에서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았습니다. 견디기 힘겨웠을까 아내의 살은 조금씩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살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문제를 안겼습니다. 몸엔 어지럼증이 생겼고 눈꺼풀은 무시로 떨렸습니다. 작은 글씨는 눈을 벗어났고 귀에서는 원치 않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일에 대한 의욕은 반토막이 났고 올라갔던 입꼬리는 겁먹은 강아지 꼬리 마냥 땅을 향해 매달렸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을 부렸고 괜한 일로 트집을 잡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많던 말이 사라졌습니다. 아내의 모습이 어색해졌습니다.
‘영양부족’
아내는 놓았던 숟가락을 다시 들었습니다. 부족한 영양이 원인이라는 진단에 따른 처방이었습니다. 쪼그라들었던 밥공기는 다시 통통해졌고 반찬 앞에서 쭈뼛대던 젓가락은 물 만난 고기 마냥 신이 났습니다.
‘그래, 이거지’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서서히 얼굴엔 화색이 돌았고, 찌푸렸던 인상도 펴졌습니다.
굳게 닫혔던 입이 풀렸고, 처졌던 입꼬리도 반가운 이 맞는 강아지 꼬리처럼 하늘로 솟았습니다. 반쯤 잠겼던 눈꺼풀도 물이 올랐고 봄꽃처럼 활짝 폈습니다.
여전히 밥 한 숟가락에 걱정 한 젓가락 얹은 식사지만 총각무 씹는 소리가 경쾌합니다.
언제쯤 세월이 새겨놓은 흔적이 매력이 될는지
언제쯤 황혼을 편히 마음껏 누릴 수 있을는지
언제쯤 세월의 흔적에 머무는 시선이 바뀔는지
무너지고 구겨지고 휘어지고 떨어지고 피로함 속에도 넉넉함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는지
언제쯤 세월의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름다울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