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관계 지속의 조건이다

아내가 시장 가는 날

by 지금

약속은 관계 형성의 기초입니다.

관계는 약속을 통해 형성됩니다.

약속은 관계 맺음의 출발입니다.


관계는 또 다른 약속을 낳고

그 약속은 거리를 좁히고 시간적으로 벌어진 사이의 틈새를 메웁니다.


약속은 관계있는 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의지적인 언행입니다.


옅은 관계의 약속은 엷습니다.

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라는 의무감도 얇습니다.


두터운 관계의 약속은 굳고 깊습니다.

진득합니다.

'꼭'이라는 책무감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관계의 지속은 약속 이행에 있습니다.

약속 파기는 관계 파괴입니다.


약속은

관계의 시작이고 관계유지의 조건이며 관계지속을 위한 의지적 노력입니다.




아내가 시장 가는 날


“여보!”


태양도 일어나지 않은 어둑한 새벽, 아내는 한밤중인 내 몸뚱이를 흔들어댑니다.


“오늘 저기 장 서는 날이야!”


“아이고 이게 웬 날벼락!”


그랬습니다.

얼마 전, 달뜬 마음으로 택배 박스를 개봉할 때 아내가 말했었습니다.

언제 장에 한 번 가자고.

그때 별생각 없이,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얼결에 그러자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늘 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갑자기 귀찮음이 밀려왔습니다.

온몸의 핏줄이 성을 내고 심장이 울부짖었습니다.

발가락 끝에 간신히 걸쳐있던 이불을 끌어올려 몸뚱이 전체를 집어넣고 단단히 조였습니다. 이런 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거칠게 변한 아내의 소리는 두꺼운 이불을 뚫고 고막을 후벼 팠습니다.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쉴 새 없이 한숨이 쏟아졌습니다.

한숨은 이리저리 밟힌 페트병처럼 온몸을 쪼그라들게 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제철 나물 좀 사고 싶다고 했던 아내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이리 빨리 올 줄 몰랐습니다.


아내는 좀 일찍 출발해야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올 수 있다며 다그칩니다.

아내의 소리가 스칠 때마다 몸뚱이는 뜨거운 불판 위 오징어처럼 돌돌 말렸습니다.


생각 없이 한 섣부른 약속

약속은 칼인 아내의 성품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한 설 된 약속

이성이 택배 박스에 팔린 틈을 이용한 아내의 요구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허투루 그러마고 약속을 해버린 겁니다.

그 약속이 화를 부른 겁니다.




아내는 시장 나들이를 좋아합니다.

한두 시간 거리에 있는 동네 장날은 꿰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시장은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동네 대형마트는 어쩔 수 없는 발길입니다.

그러나 시장은 그냥 갑니다. 딱히 내세울 이유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좋고 그 소리가 좋고 그 냄새가 좋아 섭니다.


아내는 숱한 인파를 잘도 헤집고 다닙니다.

이리저리 부딪히는 사람이 좋습니다.

뭐가 그리도 볼 것이 많은지 두 걸음에 한 번은 멈추고 낯선 누군가와 만나 낯선 무언가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다 마음이 동하면 두말없이 삽니다.

흥정도 없습니다. 부르는 것이 값이고 주는 것이 정량입니다.

낡았네, 시들었네, 적네, 바랬네, 비싸네 따지지 않습니다.

색깔이 어떻고 모양이 어떻고 시비도 없습니다.

그냥 삽니다.


“흥정이 시장의 묘미 아니냐”라는 말에


흥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손실을 강요하는 일 아니겠냐며 일축합니다.

상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마음이 이쁩니다.

상인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구입한 물건이라면 결코 행복한 마음으로 사용하고,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입기 어려울 것이라는 아내의 생각이 존경스럽습니다.


하나를 사 들고 또 다른 물건을 찾는 발길이 가볍습니다.

밝고 환한 표정 위에 콧노래가 덤으로 얹힙니다.

고향이라도 온양 아내의 발길은 온 시장을 휘젓습니다.


옛 친구라도 만난 듯 상인과의 만남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기쁨을 주고 행복을 사고, 정을 주고 또 다른 정을 삽니다.


어느새 시장바구니가 넘칩니다.

양손마저 여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내의 발길은 여전히 시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가는 이의 발높이에서 웅크린 채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 앞에 아예 터를 잡았습니다.




아내에게서

기쁘게 사는 법은 기쁨을 주는 것임을.

지갑을 돌보는 마음으로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갑을 아낀 만큼 마음은 가난해진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만큼 영혼은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아내의 시장보기는 물건이 아니라 행복을 사는 일입니다.


불평으로 나섰던 시장 나들이에서 기쁨 한아름 안고 돌아왔습니다.

거기에 시장을 따라다닌 보상으로 호빵 하나 챙겼으니 이보다 큰 즐거움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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