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치마폭

119 아내

by 지금

아내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짜증에 화가 일상이었다.

아내의 말 끝에 토를 달지 않으면 마치 진다는 의미 같았다.


나이 먹는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이에 기댄 채 거들먹거리기 일쑤였다.


이미 여기저기 금이가고 깨지고 색이 바랬다.

그럼에도 자신이 걸어온 무리한 관습마저 잇기를 고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멈췄다.





119 아내


여보!

“아우, 여기 여기~”

집안 어디서든 꼼지락 거리는 놈 하나라도 눈에 띄면 고래고래 아내를 찾습니다.

녀석들은 사지를 묶고 심장을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여보!

“이게 뭔 소리야?”

작은 우편물이라도 하나 받아 들면 으레 아내를 부릅니다.

이리저리 적혀있는 내용이 무엇이든 작동이 굼뜬 머리로는 독해가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여보!

“이거 망가졌나 본데!”

물건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평소와 조금만 상태가 달라져도 으레 아내를 찾습니다.

원인이 무엇이건 그것을 만지는 건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보!

“거긴 언제가”

어디든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으레 아내에게 그때를 묻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한 가정사에 어두운 내가 혼자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여보!

“여기서부터 또 안 되는데”

두어 시간 설명을 듣고 해 보겠노라 기세 좋게 나서지만 두어 시간 끙끙대다 결국 다시 아내를 찾습니다.

설명서를 보고 설명을 들어도 도통 뭐가 뭔 소린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보!

“이거 다 된 거야?”

이런 불이 들어오고 이런 소리가 나면 이렇게 하면 된다고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듣고 또 들었건만 결국 그때가 오면 으레 아내를 찾습니다.

그런 소리와 그런 불이 반짝이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여보!

“문에 이런 게 붙어있던데”

어쩌다 현관문에 우편물, 가스, 종교 등 크고 작은 딱지가 붙으면 으레 아내를 찾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보!

“돈 좀 보내야겠는데”

‘마음 전하실 곳’이라는 글자와 함께 찍힌 십 여자의 숫자만 보면 두려움이 일어 급히 아내를 찾습니다.

아내를 통하지 않고서는 단돈 10원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체할 줄 아는 게 뭐냐고”

“어쩜 그렇게 의지하려는 의지만 늘어나냐고”

“당신의 쓸모는 뭐냐고”

“언제까지 내가 당신 곁에 있을 줄 아냐고”


때마다 그렇게 쏟아지던 잔소리도 언제부턴가 사라졌습니다.

잔소리마저 그게 뭐냐고 되묻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한숨마저 제대로 내뱉을 수 없습니다.

한숨의 의미마저 물고 늘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입을 닫았습니다.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다시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입을 닫아서일까요

아내의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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