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 Mar 07. 2024

조울증 7년 차 (5)

슬기로운 정신병동생활 1화

폐쇄 병동에 입원하고 며칠 동안은 몽롱한 상태로 지냈다. 심한 망상과 환각 증상을 잡기 위해 약을 강하게 썼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다시 주저앉았다.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단에 필요한 심리검사 조차 할 수 없었고 한동안 정확한 진단명이 내려지지 않았다. 몸은 무거웠지만 여전히 아직은 기분기 떠있고 다양한 망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입원해 있던 병원은 상주 보호자가 필요했다. 보통은 엄마가 계셨지만 엄마가 오시지 못할 때는 엄마와 친분이 있던 권사님이 도와주셨다. 하루는 두 분 모두 올 수 없어서 간병인을 고용한 적이 있었다. 처음 보는 중년의 여성에게도 어색함 따위는 느끼지 않았고, 그녀 또한 그랬다. (그 당시 나는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가는 슈퍼파워 E였다.) 정성스럽게 간병해 주는 그녀가 고마웠고, 잠시 뿐이지만 나를 돌보면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지독한 망상은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그녀가 7살 때 돌아가신 친할머니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할머니 맞아요?"


나의 황당한 질문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불편한 기색을 비치거나 강하게 부정했다면 내가 흥분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나의 망상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환생(?)해서 나의 병간호를 하고 있다니! 기적과 같은 만남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그녀의 손을 잡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할머니의 믿음 덕분에 우리 가족은 구원받을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할머니의 자식들은 모두 천국에 갈 테니 할머니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녀에게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신기한 일들을 신나게 떠들어댔다. 물론 그 이야기들은 모두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나만의 소설이었다. 그녀는 말도 안 되는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고, 돌아가신 할머니처럼 나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전혀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늦은 오후 부모님이 오셨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할머니가 환생했다며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흥에 겨워하며 떠들어댔다. 아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정했고, 나는 항변하기 시작했다. 환생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녀에게 할머니의 영혼이 들어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빠는 내가 그녀와 더 시간을 보내면 상태가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약속한 시간보다 빨리 그녀를 보냈다. 나는 할머니와 헤어질 수 없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울고 있는 나를 엄마, 아빠는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때 나의 부모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귀여운 망상도 있었다. 폐쇄병동에는 안전요원들이 있다. 환자들이 심한 난동을 부리면 간호사들 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안전요원들이 필요하다. 내가 입원했던 병동에는 4명의 안전요원이 있었고, 2명씩 교대근무를 했다. 모두 체격이 좋고, 심지어 외모도 준수했다. 그때 당시 나의 초능력 중 하나는 원하는 상대를 100%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물론 망상이다.) 1인실에 있던 나는 심심하면 안전요원들이 있는 병동 입구에 가서 관심을 끌려했다. 이상형에 가까웠던 안전요원에게 병실에 가서 같이 놀자고 조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초능력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내게 철벽을 쳤다. 나중에 주치의에게 불필요한 성적인 표현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며 혼이 났다.


정확한 진단 위해 심리검사를 진행했지만 약에 취해있거나 격양되어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검사를 진행할 수 없었고, 그렇게 나의 슬기로운 정신병동생활은 계속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조울증 7년 차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