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통해 늪에서 빠져나오다
첫 번째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는 의외였다. 침대와 조금씩 분리되었지만, 매일 할 일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무렵 한 친구가 찾아왔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고, 예전에도 가끔씩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친한 친구였다. 친구와 커피 한잔을 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은 이야기했다. 하지만 친구는 본인에게 피해 준 것은 없으니 전혀 상관없다고 했다. 그래고 나는 매일 무료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게임이 있는데 혼자 하긴 싫으니 같이 하자고 했다. 게임에 집중하면 우울한 마음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내키지 않았지만 함께 PC방에 가기로 했다. (그때 당시 나는 시간부자였다!) 오랜만에 집 앞에 있는 PC방에 찾아갔다. 캐릭터 생성과 닉네임을 만드는 시간만 1시간이 걸렸다. 게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친구와 던전을 돌며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나의 게임중독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간단히 즐겼다. 친구와 통화하며 레벨을 올리고 캐릭터를 꾸미는 것이 다였다. 친구와 할 일 없이 필드를 돌아다니던 어느 날, 흰머리의 잘생긴 남성(물론 게임 캐릭터다.)이 말을 걸었다. 그는 장황하게 자신의 길드(부대)에 대해 설명했고 가입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막 시작한 뉴비였기 때문에 길드에 가입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처음 시작할수록 길드에 가입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함께 콘텐츠를 즐기는 것이 훨씬 재밌게 게임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는 굉장히 설득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결국 나와 친구는 길드에 가입하게 되었다. (길드 가입을 권유했던 그는 길드장이었고, 현실에선 영업을 매우 잘하는 영업사원이었다.)
길드에 가입하고 나의 생활을 180도 달라졌다. 회사 콘셉트의 우리 길드는 직책이 있었고 이제 막 들어온 나는 신입사원, 길드장은 대표였다.(실제로 지금 그는 중소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일반적인 길드와 다르게 현실의 회사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전체 회의를 했다. 처음 참석한 회의에서 나는 몇 가지 건의사항을 말했다. 이제 막 길드에 들어온 신입이 건의사항을 요구한 것은 대표에겐 신선했던 것 같다. 그 후로 대표는 나를 주의 깊게 보았는지 몇 가지 미션을 주었고, 미션을 완벽히 수행한 나는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실에서는 절대 올라갈 수 없는 '이사'자리에 까지 올라갔다. 권력(?)의 맛을 보면서 게임 속 세상에 더 빠지게 되었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에오르제아(게임 속 가상세계의 이름)에서 생활했다. 매일 2만 원씩 충전을 하고 PC방 음식을 3개씩 시켰기 때문에 PC방 사장님은 내 전용 좌석을 만들어 주었고, 나는 PC방 VIP가 되었다.
우울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매일 게임 속에 빠져사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길드 사람들과 밤새도록 디스코드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우울증의 늪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비록 게임폐인이 되었지만 침대에 누워있는 일반 폐인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걱정되었는지 외래진료에 따라와 주치의에게 하루에 16시간씩 게임을 한다고 고자질을 했다. 주치의는 게임을 하는 것 자체는 문제 되지 않지만 장시간의 게임은 중독으로 진행될 수 있으니 밤 10시 이후에는 게임을 하지 말라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가장 핫한 시간에 게임을 할 수 없다니! 가족들은 의사의 말에 힘입어 나의 시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PC방에 갈 때마다 잔소리를 했고 점점 게임하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게임하는 시간이 줄면서 다시 밤낮을 바꾸게 되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른생활 어른이(?)가 되었다. 점점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조금씩 생산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PC방 생활을 하며 20kg 정도 쪘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고 식단을 챙겨 먹으며 차근차근 체중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이 참에 몸을 만들어보자 싶어 헬스장 PT도 끊었다. 게임에 대한 관심이 줄면서 게임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길드 사람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현실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친구들과 매일 신논현에 있는 한 카페에 모여 밤새 떠들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무렵 아는 지인 소개로 주점에서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다. 첫 조증을 경험하고 1년 4개월 만에 다시 경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돌아왔고 지독했던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조울증 커뮤니티를 통해 조울증도 장애인 등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애인이 된다면 여러 가지 혜택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빠르게 서류를 준비해 신청했다. 몇 개월 뒤 '정신장애 중증'판정을 받고 장애인이 되었다. 우울증이 끝난 나는 일반적인 사람과 동일한 생산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취업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장애인으로 등록이 되고 특별히 불편한 것은 없었다. 친구들은 내게 '세금 도둑'이라며 놀리기도 했다. 그 정도로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장애혜택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조울증이 발병하기 전의 컨디션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
그 당시 성정체성에 관한 갈등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조증 때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고, 헤쳐나갈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가 있었다. 그리고 4년간 재발 없이 지내며 주치의는 단약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2차 인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