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 Mar 11. 2024

조울증 7년 차 (9)

다시 시작된 악몽

4년간 아무런 증상 없이 잘 지냈다. 나는 트랜지션(성전환)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져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해서 회사를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 남자친구도 생겼고 여느 일반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그 남자친구와는 좋은 사이로 지내고 있고,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코로나로 인한 여러 가지 제한이 끝날 무렵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새벽에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서 술을 한잔 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5명이서 술을 마시는데 친구 Y가 흥에 겨웠는지 옆집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었다.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Y에게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Y는 알았다고 했지만 여전히 시끄러웠다.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시끄럽던 Y가 다른 친구와 다투기 시작했다. 내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모두 나가라고 소리쳤다. 조용하던 내가 소리치니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술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망상은 조금씩 시작되었다.


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에 꽂혀있었다. 모두가 나를 통제하려는 것 같았다. 함께 살고 있던 남자친구가 요즘 예민한 것 같다며 조금만 마음 편하게 지내라는 말조차도 거슬렸다. 하루는 내가 머리를 묶고 나갔는데 술자리에서 시끄럽던 Y가 말했다.


"당장 머리 풀어! 너는 머리 푸는 게 더 예뻐"


그 말이 너무 거슬렸다. 친구로서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조언이었지만 나에겐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Y는 옷과 액세서리에 대해 충고하기도 하고 여러 시술도 추천해 줬지만 그 모든 말들이 Y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가스라이팅' 같았다. 나는 가스라이터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유튜브에 검색하기 시작했다. 눈을 보며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리를 피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알게 되었고 하나하나 Y에게 써먹기 시작했다. Y는 내게 요즘 이상하다며 무슨 일 있냐며 물었다. 나는 그냥 피곤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내 안에서는 쾌재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방법이 통했구나! 점점 Y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기분이 고조되어 가는 어느 날 늦은 주말 밤, 나의 안락한 원룸에서 악몽은 시작되었다. 평소와 같이 남자친구는 게임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이제 막 친해진 부산 친구와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남자친구가 하는 모든 말이 신의 메시지로 들렸다. 신의 음성을 들은 나는 다시 전도에 대한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부산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 당장 부산에 가야만 했다. KTX를 타고 지금 만나러 가겠다고 하자 놀란 친구는 지금 시간에 열차가 없으니 다음에 시간 내서 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전화를 걸어 당장 만나 함께 기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옆에 있던 남자친구는 내가 이상해졌다는 것을 눈치챘고 전화를 뺏어 친구에게 지금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다음에 다시 연락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정신이 나간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부산에 가서 전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동생은 당황하지 않고 옆에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었고 남자친구와 통화한 이후에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함께 가자고 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몇 시간 내 망상은 더욱 심해졌다. 외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내 멋대로 해석했다. 남자친구에게 악마들이 나를 노리고 있다며 집밖으로 나가선 안된다고 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악마에게 세뇌당한 경찰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칼, 가위 같은 위험한 물건들을 치워 버리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내게 다음날 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망상은 내 병식을 집어삼켰다. 나는 당장 교회에 가야 한다며 난동을 부렸고 남자친구는 내일 병원에 갔다가 함께 교회에 가자고 했다. 그리고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케이블 타이로 자신과 내 손을 묶어놓고 나를 꼭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편안한 밤을 보낼 순 없었다. 그렇게 오지 않았으면 했던 조증은 재발하고 말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조울증 7년 차 (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