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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선 Jan 25. 2023

책임을 다한다는 것

나,  너, 그리고 우리

눈앞에 보이는 하늘을 보아서는 한밤 중이다.

따뜻한 이불속을 단숨에 걷어차고 차가운 공기와 마주해야 할 시간.

늦게 잤든 일찍 잤든 하루를 시작해야 할 새벽 6시이다.

눈이 많이 내리기도 했고, 눈보라가 치는 날이라 톰슨 씨를 도와 조금이라도 치우려고 나왔다. 마침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가 어린 레트리버를 데리고 지나간다. 내게 눈인사를 하면서 겉옷을 다시 여민다. 이렇게 비가 섞인 눈보라가 치는 날엔 강아지 산책을 시켜야 하는 사람들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려견은 주인의 배려와 사랑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가족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사는 가족이라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앞 집 아저씨가 머리에는 헤드 라이트를 쓰고, 얇은 크로스컨트리 스키 유니폼(아이스 스케이트 선수의 선수복처럼 얇은 옷)을 입고 막 뛰어 나가며 인사를 건낸다.


"하이 하이 "

"이렇게 춥고 눈이 펑펑 내리는데 조깅을 하러 간다고요? "

"괜찮아요, 피그스코(piggsko, 스파이크 달린 신발) 러닝화 신었어요. 일 년 중 운동을 못 할 날씨는 없지요. 오늘 운동하러 안 가요? 아이들은 운동하지요? 운동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시켜야 해요. 당신에게도 좋아요!"

 

나는 앞 집 아저씨가 이렇게 아침 조깅하는 모습을 봄, 여름, 가을 내내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 달릴 줄은 정말 몰랐다.

'저 아저씨만 그런 걸 거야. 이렇게 날씨가 춥고 안 좋은데 정상이 아니야. 이렇게 미끄러운데 넘어지면 어쩌려고. 하... 운동을 이런 날씨에 밖에서 해야 하나.'


한 시간쯤 눈을 치우고 집안에 들어가려는데 앞집 아저씨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 돌아왔다.

"운동 어땠어요?"

"역시 최고예요. 생각보다 미끄럽지도 않았다고요. 오늘은 짧게 뛰고, 아랫동네 사시는 어머니 댁에 가서 눈도 치우고 왔어요. 눈 깨끗이 치웠네요? 고생했어요. 요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힘들죠?"

눈을 치운 후 출근준비를 마치고, 차에 시동을 걸고 내려가는데, 앞집 아저씨와 그의 아내가 여전히 헤드라이트를 헬멧 위에 쓰고 겨울 타이어까지 장착한 자전거를 타고 내게 인사를 한다.

"즐거운 하루 되라고요!

"자전거 안 미끄러울까요?"

"괜찮아요, 겨울 타이어도 달았고, 직장이 멀지도 않은데 자가용을 타기엔 아직 날씨가 좋잖아요!"

"아... 네."


'아니, 영하 8도에 눈보라인데.. 날씨가 좋다고..?'


참고로 결혼 후 같은 집에서 28년을 살았다는 그는 노르웨이 사람으로 60대 초반이다. 추위가 사라진 노르웨이의 짧은 여름에 그는 월동 준비로 바빠진다. 5월이 되자마자 본인 소유의 숲에 가서 나무를 싣고 온다. 가져온 나무를 전기톱으로 적당하게 자르고, 또다시 도끼로 장작을 팬다. 난로에 넣을 크기로 자른 후 집 앞에 1미터 높이로 길게 담장을 따라 쌓는다. 집 앞과 차고 그리고 창고 앞까지 쌓아서 멋스러운 산장느낌의 이중 담장을 만든다. 겨울 내내 실내에 가져다 놓은 마른 장작이 떨어지면 담장에 쌓아둔 것을 쓴다고 한다. 동네가 산에 둘러싸여 있고 지형상 높은 위치에 자리 잡아 다른 도시보다 2-3도 낮은 기온을 유지하는데 그 덕에 겨울도 10월 중순 즈음으로 빨리 온다. 그래서 동네 토박이들은 월동 준비를 빨리하는 편이다. 그를 지켜보면 도대체 언제 쉬는 것인가 할 정도로 매일같이 퇴근 후 운동과 집안일을 한다. 마치 겨울을 준비하는 개미 같은 느낌이랄까. 여름동안 장작준비를 다 해 놓은 후 가을까지 집 바깥을 정비한다. 겨울에 쏟아질 눈을 대비해서 지붕과 굴뚝 청소를 직접 하고 주변을 점검하고 고친다. 집구석구석을 살피며 고치기도 하고, 새로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며 페인트 칠도 덧칠하여 반짝반짝하고 깔끔한 집으로 만든다. 집과 장작 준비가 끝나면 정원이다. 넓은 앞마당과 뒷마당에 있는 잡초를 뽑고 날씨로 인해 허물어진 곳을 정비하고 필요하면 새로이 울타리도 친다. 대부분의 노르웨이 남자들은 패밀리 맨, 가정적인 편인데 가족을 위해 장작을 패고, 지붕을 고치고, 페인트 칠도 하며 살뜰히 보살핀다. 하물며 운동도 가족이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겨울에 숲 속을 산책하다 보면 그와 그의 딸이 저 멀리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고, 여름엔 크로스컨트리 스키 연습용을 타면서 (롤러스케이트 처럼 바퀴 달린 스키) 부인과 함께 동네 도로 위아래를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자전거, 조깅, 스키 등 내가 보는 것만 그렇다. 그가 이렇게 부지런하게 집을 정비하고 청소하며 운동을 하면서 열심히 사는 것은 가족을 보살피려는 책임감이 있어서라 생각한다.


   



보통의 아침 7시가 되면 나는 우리 집 택시기사가 된다. (자가용이 한 대뿐이며, 버스가 한시간에 한번 다닌다.) 톰슨 씨를 출근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장작불을 살피고, 아이들과 톰슨 씨의 도시락과 간식을 만들면서 아이들을 깨운다. 겨울의 어두운 날씨 덕에 아이들은 7시가 넘어도 곤히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정작 나는 물 한 모금 들이킬 정신없이 도시락을 만든 후 아이들에게 계란밥을 만들거나 오트밀을 끓여 차려둔다. 아이들 아침식사가 끝날때쯤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고 등교준비를 준비한다. 그래도 오늘은 오후에만 출근하는 날이라 여유 있는 날이다.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헬스장에 들러 두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집으로 온다.


집에 돌아와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이른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 메인 요리, 샐러드, 감자 등 보통 세 가지를 정신없이 요리하고, 식기세척기에 못 넣는 요리도구들은 직접 씻어야 한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면서 세탁기를 돌리고, 오후 출근을 한다. 순식간에 오후시간이 흘러가 저녁이다. 아이들과 톰슨 씨를 픽업하고 다시 방과 후 액티비티에 데려다주고, 또다시 픽업해야만 운전기사로써의 일과가 끝난다. 식구가 저녁을 먹으면 다시 치우고 오후에 해 둔 빨래를 널고, 덜 마른 어제의 빨래를 건조기에 돌린다. 주중에는 아이들의 방과 후 액티비티에 따라 저녁식사 시간이 5시가 되기도 하고 7시가 되기도 하며 각자 먹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제 어느 정도 커서 목욕을 시키거나 이를 닦는 것을 봐주거나 옷 입는 것을 도와주는 육아는 거의 없지만 여전히 집안일에 속하는 식사, 설거지, 빨래(건조와 빨래 개기 포함), 각종 청소 등 끝없이 해야 한다.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이다. 또한 청소 같은 경우는 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장작난로 옆이나 화장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먼지와 아이들이 어질러 놓은 것(장난감과 책 등)을 매일 만나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된다. 정작 내 옷 빨래는 일주일 동안 빨 타임을 놓쳐 산처럼 쌓여있다. 4인가족으로의 삶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에게 가족이 생긴 후에는 행복하고 재미있는 일상도 많았다. 하지만, 내 일 외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모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이다. 톰슨 씨가 요리나 빨래등은 도와주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은 주부인 나의 책임 아래 있다. 30대는 그렇게 일, 육아, 집안일을 반복하며 워킹맘으로 바쁘게 보냈다.

 

나는 사실 게으르고, 느리고, 잠이 많다. 운동도 매우 싫어했으며 걷는 것도 귀찮아했다. 저녁 9시에 잠들어서 아침 11시까지도 누워 있을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면 먹지도 않고 마냥 누워 하루종일 빈 둥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참 부지런하세요.' ' 어떻게 이걸 다 하죠?' '집안일을 빨리 하시네요'등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은 느려도 꼬박꼬박 하는 편이고, 좋아하는 일에는 끈기와 열정을 가지고 있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시간들 덕에 더 단련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잠이 많은 내가 아이가 울면 벌떡 일어나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타고 아이를 달래며 새벽을 보냈던 그 시간들이 있었다. 아이가 열이 많이 나면 옆에서 쪽잠자며 밤새던 날들도 많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처럼 지내지 않았을까. 지금은 일어나는 순간 '오늘의 할일 리스트'라 쓰인 포스트잇이 머릿속 주변을 맴돈다. 아이들을 보살피며 나의 가족을 부모로서 책임을 진다는 것.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인 것은 분명하다.


오늘의 할일을 다 마치고 글을 쓰고 자야지 생각했다가 두 번을 저장하고 멈춰야 했다. 아이들이 수영하고 와서 젖은 수영복과 수건을 자기전에 내 밀었기 때문이다. 하필 톰슨씨도 수영을 가르쳤던 날이라 세배로 쌓였다. 이럴 땐 얼른 세 개의 수영 가방을 해체해서 가장 빠른 사이클로 세탁 하면된다. 빨래하는동안 써야지 했는데 둘째아이가 잔다고 책을 읽어달라고 왔다. 빨리 재워야 한다.

40대인 지금도 여전히 집안일 굴레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가족과 오랫동안 함께하기 위해 나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시간만 나면 운동을 하고,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며, 여행을 다닌다.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나에게서 너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로 집중하는 삶으로 변해간다.

이것은 우리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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