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유 캔 오픈 어 부띠끄.
긴 겨울의 끝 어디쯤이라고 할 수 있는 3월 말이었다.
노르웨이로 이사 온 지 9개월 만에 우리는 이사를 결정하였다.
2020년 여름. 코비드 19로 피난 오듯 겨우 도달한 노르웨이에서는 랜선으로 계약해 둔 회색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코로나로 10일간 자가격리로 나갈 수도 없을 텐데 작은 호텔방에서 아이들과 힘들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 걱정되었지만 타국에서 결정할 수 있는일은 많지 않았다. 노르웨이에 도착하여 비대면으로 키를 받고, 코로나가 잠잠해진 한 달 후에서야 2미터 거리를 두고 집주인도 만날 수 있었다.
회색집은 스키장 산자락 옆구리쯤에 위치한 동네로, 작은 시내를 한눈에 담는 큰 창을 가지고 있었다. 언덕 정상에 있었기에 반대편 동네도 한눈에 보였고, 사슴도 종종 내려와 우리 집을 기웃거렸다. 아침해는 창 안으로 가득 찰 때가 많았으며 지는 해는 반대편에서 실크빛 스카프를 내밀듯 부드럽고 아름다운 저녁 하늘을 선물해 주는 멋진 뷰 맛집으로 기억한다. 회색집이 있는 동네는 올드시티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오래된 건물이나 역사적인 장소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었다. 옆산과 붙어 있는 덕에 매일같이 등산을 할 수가 있었다. 집의 위치는 스키장에 있는 리조트 정도의 느낌이랄까. 아님 등산할 때 보이는 모여있는 산장들 중 하나랄까. 그런 느낌이었다. 늘 도시 아파트에서 살았던 나는 이런 시골스럽고 새로운 동네가 신선하고 좋았다.
스키장이 가까이 있는 만큼 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세 번의 언덕을 넘어야 도달할 수 있었고, 겨울 내내 썰매는 기본 다운 힐 스키도 탈 수 있는 각도였다. 감히 말하건대 이 언덕은 전기 자전거도 헉헉 거리며 타고 올라올 정도로 노르웨이에 이제 막 입성한 우리의 체력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6월말에 보낸 해외 이삿짐이 두달만에 회색집으로 도착하였다. 짐이 도착한 날 부터, 파노라마 뷰를 자랑하는 백 년 조금 덜 된 이 집을 사서 새로 지어볼까 했던 말 도 안 되는 설렘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집은 역시 살아봐야 제대로 아는 것이다. 뷰 맛집에 산장 같은 노르웨이 회색집은 방 세 개, 거실, 주방, 화장실로 되어있는 90cm2 크기 였다. 하지만 오래된 집의 구조와 우리가 끌고온 산더미같은 짐은 감당이 안 되는 집이었다. 86개의 해외 이사박스들 중 50여 개의 박스는 차고와 창고로 모두 넣어야 했다. (사실 이 집에서 제일 넉넉한 공간이 실 외 창고와 차고였다) 방 세 개는 침대를 넣으면 꽉 차는 작은 방들이었고, 옷 수납이 되지 않아 임시로 플라스틱 박스에 옷을 넣었다. 엔티크로 느껴졌던 부엌은 부엌살림이 도착하자 처음 보는 구조로 바뀌었다. 나무로 만든 미닫이 문들이나 슬라이드식의 선반의 문들은 제대로 닫히지 않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식재료를 보관할 수 있는 팬트리는 외벽과 연결되어 겨울이면 얼기 일쑤였다. 요리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어 스토브옆에서 식재료들을 썰다가 싱크대로 쏟기가 다반사였다.
10월부터 시작되는 노르웨이 겨울은 추웠다. 방마다 있는 레지에이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높은 전기세가 아까울 정도로 매일 밤 추웠다. 산 자락에 있고 북동향이라 아침에 해만 찬란하였지, 점심부터는 산의 그늘과 함께 동네에서 제일 춥고 어두운 장소가 되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반 냉동고 집은 장작난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박물관에서 나온 듯한 그 오래된 난로는 작고 위험하여 사용하기조차 어려웠다.
부족한 수납과 추위에 결국 이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전 또다시 내린 눈과 따뜻한 영상 기온에 눈은 더럽혀졌고, 도로는 하얀색보다는 갈색빛에 가까운 슬러시로 철퍼덕거렸다. 이런 길을 몇 번을 오고 가야 끝나는 일이 될 것이다. 10분 거리라 다행이다.
어쨌든 이사를 해야 했다. 우리나라처럼 전문적인 이삿짐센터가 없고, 인건비가 비싼 노르웨이는 일반적으로 트레일러로 이삿짐을 옮기거나 벤(van)을 빌려 한다고 했다. 그래도 큰 도시인 오슬로의 경우는 이사를 전문적으로 해 주는 곳이 있는데, 견적을 내어 보니 1500달러 정도로 금액이 생각보다 높았다. 다행히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는 옆동네의 이사업체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두 시간이면 될 것이라며 100달러 정도를 받겠다 하며 시작했다. 차고와 창고에 쌓여있는 짐도 옮겨야 하는 것을 알게 되자 300달러로 인상되었다. 우리는 다섯 시간 넘게 옮겨야 하는 큰 이삿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쉴 새 없이 이삿짐을 옮기는 담당자들에게 물을 건넸다. 추운 겨울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시리아에서 왔다는 이삿짐을 옮기는 이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조심스레 웃으며 말했다.
"저.. 가게 오픈하셔도 될 것 같아요. 흐흐흐.. 짐이 생각보다 많네요.
(마담, 유 캔 오픈 어 부띠끄. Madam, You can open a butique...)"
우리는 한 바탕 웃었지만, 그도 나도 알고 있다. 진심으로 짐이 많다는 것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방이 5개이고 뭐든지 2개인 지금의 빨간 집으로 이사했지만, 못 풀고 살았던 50여 개의 박스를 푸는데 두어 달이 더 걸렸고, 큰 집에 살게 된 만큼 짐은 더욱 많이 늘어났다.
지금껏 회사 지원으로 세 번의 해외이사를 하였다. 안 가져가면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이삿짐을 끌고 다녔다. 큰 가구와 안 입는 옷만 처분하고 대부분 가지고 다녔다. 17년이라는 세월만큼 우리의 짐은 열 배쯤 부풀려져 있었다. 노르웨이를 떠나겠다고 다짐한 작년 10월부터 작은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방이 5개에 거실이 2개인 지금의 빨간 집에는 방마다 또다시 많은 짐들이 있고, 작은 보트와 차도 2개의 차고에 들어와 있다.
6년전 뉴질랜드에 마련한 작은 비치 하우스는 침대만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방 3개가 있는 집으로, 노르웨이에서 경험한 첫 회색집보다 작다. 건축한지 오래된 집이라 이중창도 없어 추운 집이다. 이집은 남서향이다.회색집에서 제일 생각나는 수납과 추위가 다시금 떠오른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해외 이사 업체에서 보내온 이사 견적은 뉴질랜드에서 살 수 있는 차 한 대 값 이상이다. 그럴 바엔 다 처분하고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노르웨이의 직장은 해외이사 비용이 없는 계약을 하고 온 터였다. 알고 왔으니 요구를 할 수도 없고, 우리 가족이 누린 3년간의 북유럽 경험에 대한 대가라 위로만 하고 있다.
이번 이사는 귀국이라 그런 것인지 의례 없이 큰 가구들 몇 가지를 가져가려고 했다.
북유럽풍 야외 식탁, 의자들을 먼저 포기했다. 뉴질랜드에서 구하기 어렵다는 한국산 영창 디지털 피아노도 노르웨이에 두고 가기로 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져온 예쁜 의자도 팔기로 했다. 비싸게 사서 가져온 튀르키예산 침대, 내 평생 제일 편했던 매트리스와 침대는 분명 저렴히 팔거나 무상으로 두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사실 이 침대 크기는 뉴질랜드 집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을 라지킹 사이즈이다.) 노르웨이에 와서 오랫동안 거주하겠다며 새롭게 구매한 야외 그릴이나 잔디 깎기 기계도 2개씩이다. 새로 구매한 것들을 싸게 팔아야 한다. 큰 가구들 외에 17년간 여행하며 모았던 기념품, 폴란드 그릇 등 견적에 포함된 것들은.. 셀 수가 없다.
정말이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짐이 많다.
요즘은 2년 전 노르웨이에서 이사를 담당해 준 그의 말이 떠오른다.
' 가게 오픈하셔도 될 것 같아요.. 짐이 너무 많아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날의 짐보다 두 배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톰슨 씨에게 물었다.
"당신 서재에서 꼭 가져가고 싶은 것은 뭘까. 생각해 봐. 우리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두고 가자. 이제 우리 미니멀하게 살아보자"
"기타. 당신이 50번째 내 생일날에 사준 기타. 그건 가지고 가야지"
"가서 또 사면되지."
"아니야. 그 기억을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아."
"... 그래 그럼 기타는 가져가자.. 근데 우리 악기가 몇 개인지 알아? 바이올린 두 개, 색소폰 하나, 기타 두 개, 우쿨렐레 두 개, 플루트 하나....어떻게 짐을 줄이지..?"
짐으로 꽉꽉 채워진 이 집에서 우리의 기억들이 담긴 물건들만 찾아서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이번달에는 이삿짐 견적 리스트를 보고 좀 더 비워내 보려고 한다. 뉴질랜드에서의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