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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엘리 Feb 12. 2023

직원과 사장

사장 유감, 직원 유감

“실습하는 약국에 복권 사러 오는 손님이 많아. 복권이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배워서 팔아야 겠다.“

“뉴질랜드 약국에서는 이어 피어싱을 하네. 이것도 배워야지.“

“역시 약국의 주요 수입원은 영양제 판매겠지? 영양제를 잘 팔려면 영양제에 대해 뭘 좀 알아야겠어. “

“실습 약국에는 화장품 사러 오는 손님들도 제법 있네. 화장품 공부도 해야겠다.“


우리나라에서 4년간 지불했던 대학 등록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학비를 내고 뉴질랜드의 직업학교의 일종인 파머시 테크니션 코스를 이수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약국의 멀티플레이어 직원이 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뉴질랜드 약국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많은 물건을 취급하고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더욱 잘하라’라는 생각으로 우리나라에서 직장 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약국이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를 배워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조제실 위주로 일하는 약학 테크니션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 이를 테면 이어 피어싱, 복권 판매, 여권 사진까지 익혔다. 원어민과 같은 영어 실력은 아니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무엇이든 다 해서 만회를 해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실습생에서 정직원이 되어 근무하는 내내 병가 한 번 쓴 적이 없고 다른 직원의 갑작스러운 결근에는 수없이 많이 대신 근무해 주었다.


무엇보다 눈앞에 보이는 일을 가만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바쁜 날, 하루쯤 청소기를 돌리지 않는다고 표도 안 날 텐데(실제로 매니저가 없을 때는 청소기 돌리기쯤은 그냥 넘기는 직원도 많이 보았다.) 나는 하기로 약속된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일회용 컵이나 약품을 담을 때 사용되는 병이나 용기처럼 필요한 물건이 다 떨어지기 전에 채워놓는 것, 우편물이나 서류 정리, 근처의 손님에게 약배달도 어느 순간에는 내가 하고 있었다. 손님이 뜸할 때마다 약국을 빙 둘러가며 닦지 않은 선반이 없고, 오래된 물건들 정리도 얼마나 많이 했나 모르겠다.   


잘했다고, 열심히 살았다고 칭찬하려고 쓴 것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뉴질랜드에서 약학 테크니션으로 어디에서든 얼마든 일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싶어 쓴 것이다. 내가 열심히 배워서 한 일들, 약국의 좋은 직원이 되고 싶어서 한 일들,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서 한 일들은 약국 내의 제삼자들이 보기에 모두 그저 “내가 좋아서, 내가 자처해서” 한 일이었을 것이다. 약국을 그만둘 때 이 약국의 좋은 직원이 되기 위해 내가 기울였던 노력을 사장이 전혀 몰랐던 것을 보면 사장은 약국 내에서의 나의 쓸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열심히 하지 않고, 기본만 했으면 오히려 서운하지 않은 마음으로 약국을 떠났을 터이다. 그러나 나의 열심에 비해, 나의 사직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장의 모습에 굉장히 섭섭했다.


사장은 오랜 시간 약국을 운영하며 수없이 오고 간 직원들을 보며 어쩌면 열과 성의를 다하는 직원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사장에게는 약사가 아닌 이상 테크니션이든 어시스턴트든 스치듯 왔다가는 말단 직원일 뿐이었다. 그냥 출근하기로 되어 있는 날 와서 기본만 하면 될 일이었다. 이직과 사직이 비일비재한 그의 약국에서 오바한 건 ‘나‘였던 것이다.




오클랜드의 한 호텔의 침대에 누워 모처럼 늦은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로 사흘간 휘티앙가의 모텔을 우리의 만능 직원 켈리에게 맡기고 오클랜드 맞이한 첫 아침이다. 큰일이 아니라면 연락을 잘하지 않는 켈리에게 아침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기로 되어있는 클리너 직원 제이슨이 안 왔단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새 직원이었고, 우리가 모텔을 비울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면서 꼭 와야 한다고 불과 며칠 전에 한 번 더 확인까지 했었는데 무슨 일일까 싶어 제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이슨! 무슨 일 있나요? 오늘 일하러 오기로 되어 있잖아요.”

“아. 제가 다른 일을 하기로 했어요.”

“음. 알겠어요. 우리 모텔에서 더 이상 일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만둔다고 그저 좀 알려주지 그랬어요.”


오래 일할 직원은 아니라고 처음부터 느낌이 있던 직원이긴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지 않은 직원 때문에 켈리가 아침부터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눈에 선했다. 다행히 켈리에게는 이런 위기의 순간에 부르면 달려와 주는 켈리의 엄마가 있다. 이렇게 켈리의 엄마 덕분에 위기를 넘긴 것이 이번 여름에만 몇 번째이다.


모텔을 운영하면서 늘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성실한 직원의 확보이다. 클리너가 하는 일은 힘은 조금 들 수 있겠지만(그렇지만 70대에 접어든 켈리의 엄마도 일을 한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 아무런 자격도 경험도 요구하지 않는다. 부지런히 구석구석 깨끗하게 잘 청소해 주는 것이 클리너의 당연한 직무라고 여기기에는 이런 직원이 매우 드물고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년 간 여러 명의 직원이 오가는 사이 깨달은 바는 오기로 한 날 출근해서 일해주기만 해도 최고의 직원이다. 적어도, 아프거나 일이 있는 날은 못 온다 연락을 주고, 한 달만 일하더라도 그만둘 거면 그만두겠다 노티스를 주는 직원이면 다행이라는 뜻이다. 면접을 볼 때에는 무척 열심히 일할 것처럼 해 놓고, 정작 트라이얼을 하기로 한 날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지원자, 일을 시작하기로 한 날에 요즘 가장 흔한 핑계로 ‘코비드에 걸려서 못 나오겠다.’라고 한 지원자도 벌써 여러 명이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 솔직하게 안 하겠다라고 말해도 되는데 거짓 핑계를 둘러댄다.) 일을 하러 한 두 번 나오고 연락이 두절된 경우도 몇 번 있다. 몇 달을 일하다가도 서서히 연락이 안 되더니 결국에는 흐지부지 그만둔 직원도 있다.


인구가 많지 않고 이렇다 할 산업이 없이 관광업과 농업이 주를 이루는 뉴질랜드는 의외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다. 일정 수입 이상을 벌면 국가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을 수 없어 국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경계선까지만 딱 일을 하고 더 이상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최저 임금을 받을지라도 일 년을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 보조금을 받기에는 수입이 너무 많아, 일 년을 꼬박 채워 일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 몇 달만 일을 해서, 돈을 반짝 벌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여름휴가를 시작하며 직장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자체적으로 일을 그만둔다. 이들에게는 좋은 레퍼런스나 견고한 경력도 필요 없다. “그만두겠습니다.”, “하지 않으려고요. “ 같은 말도 필요 없는 것이다.




열심인 직원을 잘한다 눈여겨 봐주는 사장을 만나는 것과 ‘못 온다, 그만둔다’는 확실히 말해주는 직원을 원하는 것이 정녕 큰 꿈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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