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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엘리 Feb 23. 2023

날씨가 다 했네

빛의 색 뉴질랜드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한 여배우는 여행지에 갈 때마다 그 도시와 어울릴만한 향수를 산다고 했다. 도시마다 다른 향수를 뿌리고 여행을 하면 각각의 향을 맡을 때마다 기억 속의 도시가 고스란히 떠오르기 때문이란다. 어떤 사람은 여행지에서 들었던 음악으로 여행지를 기억한다고 했다. 거리 공연에서 우연히 들려온 음악이 낯선 여행지의 공간과 음악을 하나로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는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자동으로 재생되고 있던 음악 중 한 곡이 도시의 풍경과 마침 기가 막히게 어울릴 때도 음악으로 여행지를 기억하게 된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에도 런던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처음 봤기 때문에, ‘오페라의 유령’에 등장한 곡이 들릴 때면 런던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굳이 따지자면 청각보다는 시각의 사람이라 색깔로 도시를 기억한다. 이를 테면, 태국 방콕은 노란색 도시이다. 거리의 승려들이 입은 옷, 불상, 황금색 왕궁, 망고, 방콕 여행에서 내가 입었던 티셔츠마저도 하필 샛노란색이어서 방콕을 생각하면 노란색이 떠오른다. 미국 서부 피닉스는 황토색 도시다. 피닉스가 흙먼지 날리는 사막에 세워진 도시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 것인지 그랜드 캐년을 봐도, 옛 카우보이 마을 관광을 떠올려도 온통 붉은빛이 도는 황토색이 떠오른다. 물기 하나 없는 바싹 마른 황토색 흙 위에 기괴하게 서 있는 가시 달린 선인장은 세트다.

 

여행지로서 뉴질랜드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무슨 색일까? 이름부터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아오테아로아(Aotearoa, 뉴질랜드의 마오리어 국명), 뉴질랜드는 역시 흰색이다. ‘햇빛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엄청난 자외선 때문에 햇빛이 더 강렬하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눈으로 본 기억 속의 뉴질랜드는 모든 것이 눈부셨다. 평범한 색이 아니라 ‘맑은’ 하늘색, ‘빛나는’ 초록색 이런 식이다. 아름다웠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정말 말 그대로 햇볕에 눈이 시릴 정도로 구석구석 햇살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햇빛색의 장소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여름, 이 햇빛색의 나라 뉴질랜드에 연이어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강력한 태풍이 불어왔다. 이례적인 일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피해가 뉴질랜드 북섬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내가 살고 있는 코로만델, 휘티앙가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키위들이 즐겨 찾는 눈부신 여름 휴양지’로 알려진 이곳이 올여름만큼은 눈부신 날이 얼마 없다. 심지어 코로만델 반도로 들어오는 주요 도로가 폭우로 붕괴되면서 드나듦이 불편해졌다. 예산도 자원도 인력도 부족한 뉴질랜드에서 언제쯤 유실된 도로가 복구될지는 모를 일이다. 폭우와 태풍으로 취소된 예약만도 엄청나다. 당분간은 시간이 더 걸리는 우회도로나 여러모로 불편한 비포장 도로를 이용해 기꺼이 관광을 올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코로나로 락다운을 겪었던 시절처럼, 다시 타운이 조용하기만 하다.



 

지난 주말, 미처 여행을 취소하지 못한 외국인 단체 관광객이 고맙게도 우리 모텔에 머물렀다. 뉴질랜드로 입국하기 전부터 곡절이 많았던 손님들이다. 뉴질랜드에 불어닥친 강력한 허리케인 때문에 출발도 못하고 일정이 하루 미뤄졌고, 수화물 마저 제대로 도착하지 않아서 그것을 기다리느라 일정을 변경해 오클랜드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고 한다. 휘티앙아로 오는 길 마저 험난해, 우회 도로로 돌고 돌아 힘겹게 도착했다. 게다가 휘티앙아 주요 관광지인 캐시드럴 코브의 하이킹 코스마저 지반 약화로 통제인 상태라 예정되었던 장소도 방문하지 못했다. 다행히 손님들이 머무는 이틀 동안에는 다시 해가 났다. 뉴질랜드의 눈부신 여름날이었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보며 아침부터 동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손님이 모텔 앞에 서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는 모텔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내게 먼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굿모닝. 아! 정말 아름다운 날씨예요. 그렇죠?”


며칠 전의 엄청난 태풍은 언제 왔다 갔나 싶게 맑은 날씨에 손님들의 기분이 좋다. 북반구의 추운 겨울에서 왔으니, 이 따뜻한 햇살이 얼마나 반가울까 싶다. 햇살 한 자락에 지난 며칠의 고생도 눈 녹듯이 녹은 것 같다. 나도 손님에게 웃으며 화답한 후 준비실로 들어가 짝꿍에게 말한다.

 

“날씨가 다 했네. 모든 것은 역시 날씨로구나.”  


일상을 살아갈 때는 맑은 날도, 비 오는 날도 모두 하루하루 지나가는 평범한 날들이다. 그러나 인생에 처음으로 뉴질랜드로 관광을 온 모텔 손님에게는 비 오는 날과 맑은 날이 똑같이 좋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해가 비치는 날과 흐린 날의 바다색이 천지 차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맑은 날에는 새하얀 레이스 같이 찰랑이는 예쁜 파도를 시작으로 옥색, 하늘색, 파란색, 짙은 파란색으로 단계별로 펼쳐지는 바다에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인다.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반짝임은 덤이다. 반면 비 오는 날은 검거나 짙은 회색 빛의 바다가 시커먼 때를 씻어낸 비눗물처럼 탁한 색의 포말을 무지막지하게 뱉어내며 포효하는 무시무시한 파도를 만난다.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도 거든다. 토끼의 간도 꺼내어 말릴 수 있을 만큼 맑은 날에는, 마음속의 우울과 침잠도 모두 햇살의 명랑함과 여행의 설렘으로 바스락거리게 마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곰팡이 냄새처럼 실망감과 답답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행지에서의 날씨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뉴질랜드를 햇빛색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힘든 일정 속에서 우리 모텔에서 머물고 간 손님들이 부디 휘티앙가와 뉴질랜드를 눈부신 곳으로 기억하면 좋겠다. 햇빛색의 나라 뉴질랜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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