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아이들은 손꼽아 기다리던 유인물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형광펜을 꺼내 색색깔로 알록달록 칠한다. 유인물 속의 네모 칸을 일주일 단위나 하루 단위로 잘라 날짜순으로 겹친 뒤 한쪽에 스테이플러를 박아 작은 책자처럼 만든다.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은 책자가 된 유인물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책상 한쪽 모서리에 단단히 붙여 놓거나 스테이플러 심이 박힌 한쪽 끝에 집게를 집어 책상 옆의 걸이에 걸어 놓기도 한다.
이 소중한 유인물의 정체는 바로 한 달에 한 번 나누어 주는 급식 식단표이다. 하루에 적어도 두 번, 또는 세 번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아이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유인물이다. 부모님 서명을 받아와야 하는 정작 중요한 유인물은 버려져서 교실 바닥에 뒹구는 일이 흔해도 매일의 식단이 안내된 유인물은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애지중지한다.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은 좋아하는 메뉴가 나오는 날이면 칠판 한쪽 구석에 메뉴를 적은 후, 분홍색 하트를 그리고 밑줄도 긋고 수업 시간에도 흘긋 거리며 맛있는 메뉴에 대한 설렘과 기쁨을 맘껏 누린다. 예를 들면, 치킨마요 덮밥, 삼겹살과 쌈, 닭다리 오븐 구이 같은 메뉴에는 분홍색 하트 뿅뿅, 노란색 밑줄 두 줄은 기본이다. 어느 날 홀연히 회오리 감자 같은 신메뉴라도 등장하는 날에는 학교 전체가 축제 분위기다.
전교생의 3분의 1 정도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나머지는 통학을 하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루 종일 학교에 있는 아이들에게 식사만큼 기다려지는 시간이 또 있을까? 맛있는 메뉴에 깔깔대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이런 아이들 덕분에 나도 그날의 점심 메뉴를 알고, 아이들이 흔히 줄여 쓰던 식단 용어, 이를테면 ‘방토(방울토마토)’, ‘치떡(치즈 떡볶이)‘ , ’ 수다날(수요일은 다 먹는 날)‘, ’ 생일상(쌀밥과 소고기 미역국 나오는 날)‘ 과 같은 재미있는 말들로 함께 웃고 떠들었다. 같은 음식을, 같은 공간에서 먹고, 같은 음식을 이야기하고, 급식소 입구에 놓인 커다란 식수통에서 뜨거운 보리차를 한 컵 받아 호호 불어 식혀 먹어야 한 끼의 식사가 마무리된다. 지극히 평범한 날들의 무수히 많은 식사들이었다. 돌아보니, 그 시절의 점심 식사가 참 소중하고 애틋하다. 끈끈한 밥심으로 연결된 느낌이다.
뉴질랜드에서 근무했던 약국은 사무실과 상점이 밀집해 있던 지역에 위치했다. 정오 무렵부터 약 두 시간 동안의 점심시간에 손님들이 가장 많이 몰린다. 어느 날부터 매니저는 손님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에는 직원들이 가급적 식사를 하지 않기를 원했다. 안 그래도 삼십 분 밖에 안 되는 빠듯한 점심시간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점심을 먹는 시스템인데, 그날 이후로 점심 식사의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11시 20분에 한 명이 점심을 먹기 시작해서, 11시 50분에 다음 사람이 먹고 중단되었다가 1시 30분에 다시 한 명, 2시에 한 명 이런 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약국 내에 변변한 스태프 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각종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좁은 공간에는 탁자도 없었다. 키 작은 냉장고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도시락 통을 무릎 위에 놓거나 손에 들고 먹었다. 삼십 분 안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가서 사 먹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메뉴는 김밥보다 손이 덜 가는 유부 초밥, 볶음밥이었고, 그도 아니면 마트에서 사놓았던 베이커리와 과일이 주였다. 전자레인지에 데워 찬기를 없앤 작은 도시락 통의 밥을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 넣는다. 텅 빈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지런히 먹지 않으면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없기 때문이다. 밥을 입으로 넣으면서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동시에 머그에 믹스 커피 한 봉지를 탈탈 털어 넣는다. 밥을 얼른 먹고 커피를 후후 불며 마신다. 양치까지 하려니 삼십 분이 너무 짧고 정신이 없어, 나중에는 양치 대신 껌을 택했다. 점심시간에 양치를 했던 직원은 어차피 나뿐이었기 때문에(양치를 할만한 세면대 공간이 딱히 없었던 것도 양치를 포기한 하나의 이유) 껌을 택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양치를 포기한 후 얻은 오 분에서 십 분의 커피 타임은 꿀맛같은 휴식이었다. 동료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웃고 떠들며 맛있는 음식을 놓고 식사를 한 것은 1년에 딱 한 번, 크리스마스 저녁 만찬날이 유일하다. 동료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깔깔거리는 식사의 기쁨을 누리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근무했던 약국이 뉴질랜드의 평범한 다른 직장에 비해 점심시간이 열악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뉴질랜드의 점심시간이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것은 분명하다. 이곳에서의 점심은 ‘스낵‘의 개념이다. 일하는 중간에 쉬면서 요기를 하는 것이 점심인 것이다. 이에 맞춰, 메뉴도 업무 책상에서 또는 밖의 벤치에 앉아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나 과자, 에너지바에 음료 정도다. 점심시간을 줄여 일찍 퇴근을 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에 공을 들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이런 문화에 어떤 개인적인 생각과 판단을 넣을 생각은 없으나 가끔은, 섭섭한 점심이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시작한 모텔업이다. 몇 년간 해외 여행객들이 뉴질랜드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불과 얼마 전부터 다시 해외 단체 관광객이 휘티앙가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우리 모텔에 지속적으로 오는 해외 단체 관광객은 주로 독일에서 오는 시니어 그룹이다.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예상외로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중간에서 일을 하는 여행사에서는 우리 모텔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기를 원했다. 우리 모텔은 코로나 이전에 간소한 아침으로 식빵, 시리얼과 우유, 인스턴트커피와 차 정도를 제공했으나 이를 중단한 지 벌써 3년이 되어간다. 게다가 우리가 제공했던 아침 식사는 독일인들이 원하는 아침 식사와는 거리가 멀다.
수없이 논의를 하다가 우리 모텔 맞은 편의 카페에서 그들에게 아침을 제공하기로 했다. 식사비는 여행사에서 카페로 직접 지불하고, 관광객의 일정과 인원수에 맞춰 중간에서 조율하는 역할은 우리 모텔이 한다. 카페에서 뷔페식으로 시리얼, 뮤즐리, 빵, 버터와 잼, 커피, 우유, 차를 그들이 원하는 예산 안에서 준비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비로 인해 그들의 계획된 일정은 취소되었고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늦게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문제의 시작이었다. 하필 그날,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모텔에 머물렀고 식사시간이 늦어지게 되면서, 카페의 일반 손님과 독일인 단체 손님이 카페에서 뒤섞이게 된 것이다. 비가 와서 야외에 앉을 수 없으니, 카페 실내는 습기와 열기로 불쾌지수가 올라갔다. 카페 직원도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할 수 없었고, 독일인 손님들은 그전에는 하지 않았던 메뉴에 대한 불만까지 동시에 터트렸다.
“독일인들은 든든한 아침을 먹는다. 있어야 할 든든한 곡물빵도 하나 없고, 제대로 된 치즈, 소시지나 고기도 없다. 과일 샐러드나 계란도 없지 않냐?”
사실, 독일인의 아침 식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독일인과 뉴질랜드에 사는 유럽 출신의 백인들의 식사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게다가 여행하면서 먹었던, 호텔 조식 뷔페는 모두 고만고만한 서양식 아침 식사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든든한 독일인의 아침식사”라니,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행사 측에 문의도 하고, 구글 검색을 해서 독일인의 아침 식사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봤다. 결국, 약간의 비용을 더 지불하는 것으로 하고 치즈와 콜드 밋(cold meat)을 추가하고, 빵을 곡물빵으로 바꿨다. 카페에서 과일까지는 제공할 수 없다 해서, 우리 모텔에서 약간의 과일을 준비해 아침 뷔페 상차림에 추가했다.
먹으려고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엉뚱한 생각에 미칠 때가 있다. 내가 아무리 평균보다 적은 식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긴 해도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먹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에너지를 가져다주는지 모를 리 없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문화는 다르겠지만 먹는 것이 사는 것만큼 중요할 것이다. 다른 나라에 와서 살며,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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