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엘리 Jan 10. 2023

냄새 기억

온다 온다 그녀가 온다

긴 직사각형 형태의 약국 맨 안 쪽은 조제실이다. 온갖 처방약들이 가득한 조제실은 관계자만 출입하는 일종의 제한 구역이다. 그곳이 약국에서 내가 주로 일했던 공간이다. 손님이 뜸한 어느 조용하고 한산한 아침이었다. 팩스기에 쌓여있는 처방전들을 차례로 처리하고 있는데 다른 종류의 냄새가 코로 들어온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조제실 반대편 끝의 출입문을 바라봤다. 햇살이 쏟아지는 눈부신 거리를 뒤로 한채 검은 형체가 점점 짙어지는 냄새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그녀였다. 냄새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녀.


그녀는 약국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아흐멧의 엄마이다. 정작 그녀의 이름은 모르고, 이제는 얼굴도 희미하지만 그녀가 종종 아들 아흐멧의 약을 가지러 약국에 들른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녀가 얼굴을 제외한 몸 전체를 덮는 길고 검은 옷을 입고 종종 약국에 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와 함께 오는 ‘아흐멧’이라는 이름의 꼬마가 눈을 떼면 안 될 만큼 부산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에게서 풍겼던 체취 때문이다. 체취가 어찌나 강력한지 그녀가 약국에 등장하는 순간, 제일 안쪽의 조제실에서조차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냄새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에 살 때에는 체취가 문제가 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체취를 감추는 제품인 데오드란트 역시 텔레비전 광고나 외국 여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볼 일이 없는 물건이었다. 외국에 나와 살고 보니 공공장소에서의 B.O (Body Odor, 체취/ 암내라고도 번역됨)는 공공연하게 논의되는 제법 흔한 문젯거리다. 약국에서 아침 여덟 시부터 아홉 시 사이에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 중의 하나가 데오드란트라는 점 (집에 두고 온 것을 발견하는 순간 약국에 들어와 급하게 데오드란트만 사들고 나간다), 다양한 브랜드의 비슷한 듯 다른 종류의 데오드란트가 약국 선반 한 칸을 모두 채우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체취’가 매우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약국의 선반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데오드란트의 진열 역시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일종의 B.O의 세계였다. 선반에 한 개씩 제품을 올려놓으며 차이점을 찾아낸다. 대충 올려놓았다가는 안내된 가격표와 다른 곳에 놓을 수도 있어 주의를 기울인다. 일단, 남성용과 여성용의 구별은 분홍색과 파란색의 구별만큼 쉬운 단계다. 다음은 용기의 차이를 살펴야 한다. 길고 가벼운 틴케이스는 스프레이 타입, 원통형의 유리병은 롤온 타입, 딱풀처럼 아래 부분을 돌릴 수 있으면서 원통을 앞뒤에서 납작하게 눌러 놓은 플라스틱 용기는 주로 스틱 타입이다. 같은 브랜드의 같은 용기 제품이라도 향에 따라 뚜껑의 색깔이나 레이블의 꽃그림 색깔이 다른 경우도 있어 이것도 구별한다. 데오드란트를 진열하면서 추가로 알아두어야 했던 점은 “알루미늄 프리”인가 아닌가였다. 찾아보니 알루미늄 성분이 유방암을 비롯한 부작용을 야기한다는 말들이 있어 알루미늄이 없는 천연 성분이라는 것을 광고 전면에 내세운 제품들이 종종 있다.  


이제는 기억에도 없는 수많은 손님들 중 냄새로 아흐멧의 엄마를 기억하는 것처럼 그것이 향기이든 악취이든 냄새의 기억은 때로는 시각적 기억보다 더 강력하게 오래 남기도 한다. 이를테면, 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할 때 피어오르는 비 냄새, 엄마의 부엌에서 압력 밥솥이 치흑치흑 소리를 내며 끓다가 이윽고 김을 한 번에 쏘아 올릴 때의 밥 냄새 같은 것 말이다. 태국 방콕 공항에 내렸을 때 사방에서 한꺼번에 몰려들어 내가 숨을 쉬는 것인지 공기가 코로 밀려드는 것이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무덥고 습한 공기 냄새, 이탈리아 베니스 수로 주변에 도착했을 때 좁은 골목골목을 형체 없는 유령처럼 맴돌며 다가왔다 멀어지던 물 비린내도 내게는 코끝에 남아있는 냄새 기억이다.





처음 모텔을 하기로 했을 때, 고급 호텔처럼 우리 모텔에도 시그니쳐 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로마 향초와 디퓨저를 만드는 법도 배웠다. 그런데 막상 어떤 향을 객실에 입히려고 하니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내게는 좋은 그 향기가 누군가에는 좋지 않은 악취일 수도 있다. 각종 알러지에 예민한 사람들은 성분 하나하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냄새에 대한 개인의 기억과 선호도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폭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현재 객실 청소의 목적은 시그니처 향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냄새이든 사람이 남겨놓은 냄새를 없애는 것이다.


손님들이 머물렀다가 떠난 객실에 들어간다. 치워야 할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동시에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흡연자 손님이 머물다 간 방은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더라도 고린 담배 냄새가 난다. 전날 맥주를 진탕 마신 손님이 머물렀던 방에서는 엄청난 개수의 맥주병이 눈에 들어오는 동시에 지릿한 맥주 냄새가 난다. 숙면용 라벤더 방향제를 베개에 뿌리고 잠들었던 손님이 머물렀던 방에서는 마른풀 냄새 같은 라벤더향이 난다. 방금 향수를 뿌리고 손님이 체크아웃한 방에서는 복도 끝에서부터 진한 향수 냄새가 떠돈다.


모텔 객실 청소는 환기로 시작해서 환기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손님이 떠난 후, 본격적인 청소를 시작하기 전 객실의 커튼을 제치고 모든 문을 활짝 연다. 비로소 방안에 햇살이 비치고 공기가 돈다. 체취와 온기가 깃든 리넨과 베갯잇을 세탁과 다림질이 된 새것으로 교체한다. 냉장고와 전자레인지의 문을 열어 혹시 남아 있을 음식 냄새도 날려버린다. 화장실과 샤워실 문을 열고 흔적을 닦고 허공을 향해 탈취제를 칙칙 뿌린다. 청소를 마친 후에도 새 손님이 체크인하기 전까지 문을 닫지 않는다. 바스락거리는 햇살 냄새와 소금기 머금은 바다향을 실은 바람 냄새가 객실을 가득 채우기를 바란다. 손님들이 우리 모텔을 모텔 냄새가 아니라 휘티앙가의 파아란 바닷바람으로 기억 속에 남기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속이 없는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