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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선 Jan 07. 2023

소속이 없는데요.

나에게 집중하는 삶

2015년, 10년간의 폴란드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나라로 이사를 했다. 둘째 아이가 막 첫 돌을 지났을 때라 이사하기 전에 육아 휴직을 자청하였다. 마침 첫째 아이의 새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오리엔테이션이 있어 부모로서 참가한 날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학교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매일 이용한다는 카페테리아를 혼자 구경하고 있는데 동양인 여성 한분이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어, 안녕하세요. (큰 목소리로) 한국인이세요? 저는 ㄱ 회사 소속 ooo고, ooo 엄마예요. 반가워요"

"아,........(작은 목소리로) 저는 현재 소속이 없는데요. ooo이라고 합니다. 저희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반갑습니다"


그 한국인 여성분 입장에서 어이없는 대답을 한 나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8년 전인데도 이 짧은 대화는 내 기억에 생생하다. 이 대화를 나눈 분과는 지금까지 언니 동생 관계로 남았다. 우리는 종종 기억에 남는 첫 만남(나의 우스운 대답으로)을 꺼내어 웃고는 했다. 그저 해외 주재원으로 온 가족으로써 소속을 밝히신 것이었는데 나의 소속(직장)을 말해야 하는 줄 알고 소심하게 한 대답이다. 생각해 보면 oo기업을 다니셨던 아버지의 직장이 어머니의 소속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휴직을 한 나에게 소속되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함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서둘러 복직을 했다. 그 후 퇴사를 하고 싶게 하는 사건이 있었고, 매일이 힘들었다. 하지만 소속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 그 곳을 떠날 때까지 직장을 그만 두지 못한 채 5년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15년 전 톰슨 씨와 결혼을 하였다.

서양에서는 결혼을 하면 무조건 부부가 같은 성을 쓴다고 생각을 했다.(알고보니, 부부의 선택사항이고 안 바꾼 사람들도 많다) 결혼과 동시에 남자성을 따라 한 가족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당연해 보였고 멋져 보였다. 생각해보면 성을 바꾸는 사람은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남인데 말이다. 나는 왜 남편 성이나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것이 늘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일까. 자연스럽다는 것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편 성을 갖고 싶었다.


마침 한국에 입국하여 늦은 혼인 신고를 마친 후 여권이 만료되어 새 여권을 신청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혼인 신고 또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결혼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결혼할 당시 남편이 뉴질랜드 국적이니 당연히 그의 성과 국적을 나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현재도 한국은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 중 하나이며,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 여권을 유지하는 한 나는 남편의 성으로 바꿀 수 없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 아버지 성을 유지해야 하며 뉴질랜드 시민권도 여권도 가질 수 없다.

결혼을 하여 남편에게 소속되고자 하는 마음, 혼인 신고를 하여 가족구성원으로서 소속되고자 하는 마음, 남편의 국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마음, 회사에 소속되고자 하는 마음(내 직장이 없으면 남편 회사에 소속되고자 하는 마음)등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들이 있었다. 이 욕구들을 채울 때마다 어딘가에 존재했던 불안감과 우울함을 함께 떨칠 수도 있었다.


Maslow는 인간의 행동은 다양한 동기에 의해 유발되며, 이러한 동기들은 위계적 구조를 이룬다고 하였다. 그의 이론에는 다섯 가지 욕구 위계가 있다. 인간은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욕구, 존중 욕구, 자기실현 욕구를 단계별로 이루려고 한다는 이론이다. 특히 첫 네 단계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욕구, 존중 욕구)는 결핍동기라고 칭하였으며, 마지막 자기실현 욕구는 성장동기 혹은 존재동기라고 구분하였다. 즉 인간은 자기실현을 지향하는 삶을 살지만 하위 동기인 결핍동기가 해결되지 않으면 상위 동기인 자기실현 욕구까지 발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Maslow의 이론에 따르면, 내가 그토록 소속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라 그런 것이다.


졸업 후 취업과 결혼의 압박에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했던 시기였다. '나'라는 독립된 인간을 책임져야 하는 시기라 더 그러하였다. 부모에게서 제대로 독립하려고 갈팡질팡 하였다. 취업을 우선순위에 두었고, 취업 후 지금의 남편을 만나 안정된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의식주에 해당되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 대한 욕구가 채워진 나에게는 애정욕구가 급격하게 높아지면서 의미 있는 집단에 소속되고 그 구성원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분출하면서 나를 더 생각하는 존중욕구까지 가지게 되었다. 근무하는 곳의 책임자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동료에게 지지 않으려고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고 겉모습에도 꽤나 신경 쓰며 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동기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현재에 집중하는 편이다. 특별히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지금보다 나은 집에는 언제쯤 입성할 수 있을지, 내년 연봉이 어떨 것인지 혹은 더 좋은 물건들을 살 수 있을 것인지를 1순위로 두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모든 물질적 풍요와 문명의 혜택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편하고 좋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일 당장 죽어도 후회없을지, 어떻게 하면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을지가 더 궁금해졌다.


최근에는 남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기실현을 돕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도 상당하다) 그들은 종종 '나도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할 수 있다. 내가 도와주겠다'라는 말을 한다. Maslow가 말한 마지막 단계, 상위 동기인 자기실현 욕구를 달성하는 사람들이다. 놀랍게도 실물을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소위 성공해 보이는 듯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유명하기도 하고 평범하기도 한 이들이다. 사업가, 유투버, 글 작가, 환경운동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그들의 마음가짐이 나를 열심히 다독인다. 그들과의 비대면 만남을 통하여 오롯이 나를 위한 2022년을 만들었다.


지금은 소속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소속의 얽힘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여 행복한 삶을 지향하고 있다. 요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나를 소개하는 순간이 온다. 쿵쾅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한다.


"저는 그림 그리고 글을 쓰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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