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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모를 줄 알았던 단어가 내 삶에 침투한 날

das Kriegsrecht

by 수지

12월 3일 화요일, 오후 5시.

하이델베르크 시립도서관.

넷이서 하기로 한 조별 과제를, 결국 나 혼자 끌고 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제출 직전까지 붙잡고 있었겠지만, 그날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

과제를 오후 중에 마무리하고, 저녁엔 며칠 전부터 열렸다는 크리스마스마켓에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허락한, 작은 '보상'이었다.


집중해서 문제를 풀었다.

마지막 한 문제를 남긴 시점,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공책을 덮고 핸드폰을 들었다.

무심코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피드 맨 위에는,

대통령 얼굴 아래 쓰인 큼지막한 문구.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딥페이크도 좀 현실감 있게 만들어야지...'

다시 문제를 풀려던 찰나,

카카오톡 알림이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미친 일이 벌어졌어.'

'이게 무슨 일이야...'


알림 창 앞부분만 봐도 심상치 않은 내용들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너무 많은 메시지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어느 채팅방을 먼저 열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돌이켜보면,

그 혼란 속에 뛰어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메시지를 뒤로 한 채, 네이버에 접속했다.

그쯤부터,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방금 봤던 그 인스타 게시물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장 계엄군, 국회 본관 진입'

네이버 메인 화면에 걸린 속보였다.

국회라면, 여의도. 우리 부모님이 계신 곳이었다.


"지금 집이야? 밖 아니지?"

카톡 한 줄을 쓰는데, 이상하게 손가락이 잘 안 움직였다.

엄마에게서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비상계엄이 말이 되냐며, 분노가 이어졌다.

그러다 마지막엔,

"일단 넌 독일이니 하던 일 마저 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다시 과제를 열었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뉴스 화면만 계속 새로고침했다.

사실, 새로운 소식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같은 기사 제목뿐이었다.

그래도 계속 눌렀다. 새로고침. 또 새로고침.

'비상계엄 해제'라는 한 줄을 보기 전까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영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단어들 사이를 한참 헤매다가 -

마침내 핸드폰을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더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하이델베르크 시립 도서관은 여전히 고요했다.

한 시간 전과 다름없이, 사람들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 세상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됐는데, 이곳은 여전히 크리스마스 조명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새로고침을 반복하는 사이, 도서관 문 닫는 시간이 되었다.

즐거운 표정으로 크리스마스 마켓을 누비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멍하게 역으로 걸어갔다.

트램을 기다리는데,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전광판 속 작은 뉴스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 뉴스 속보였다.

"Südkorea: Präsident verhängt Kriegsrecht (한국: 대통령 계엄령 선포)"

das Kriegsrecht. 계엄령.

평생 알고 싶지 않았던,

알 일도 없을 줄 알았던 단어였다.


그날 저녁, 하이델베르크는 유독 평화로웠다.

나는 그 평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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