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땜의 하루
한국에서 우리는 방콕에서 2주의 시간을 보낸 후 슬리핑 기차를 타고 치앙마이로 넘어가기로 계획을 세웠었다. 그때 우리가 선택했던 이동수단은 비행기보다 저렴하고 기차여행의 로망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슬리핑기차'였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짐을 챙기고 방콕에서의 마지막 호텔에서 체크 아웃을 한 후 바로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역은 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다. 한국에서 찾아봤던 블로그 후기로는 플랫폼을 찾아가라고 되어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막 헤매던 도중 우리는 푸드코트를 발견했고, 우선 허기부터 채우기로 했다. 거기서 기차에서 먹을 간식 몇 개와 당장 점심식사로 먹을 만두처럼 생긴 태국음식을 샀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승강장같이 보이는 곳의 문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여기가 맞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티켓만 뒤적거리며 헤매고 있으니 역무원께서 다가오셔서 우리 승강장 위치를 확인해 주셨고 다행히 우리는 승강장을 찾을 수 있었다.
승강장도 찾았고 기차시간도 조금 남았겠다 나와 친구는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친구의 대학 수강신청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사실 이때부터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분주하게 줄을 서기 시작하길래 우리도 따라서 줄을 섰다. 앞에 서계신 분에게 여기가 이 티켓 승강장이 맞냐고 여쭤보니 굉장히 친절하게 내 티켓과 본인의 티켓을 비교하며 확인해 주셔서 마음 편히 룰루랄라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키가 큰 역무원분이 큰 목소리가 무언가 말씀하셨고 갑자기 그 긴 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감도 잡지 못하겠고 친구도 수강신청으로 멘탈이 와르르 무너진 상태였어서 우선은 상황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친구를 끌고 역무원에게 다가갔다.
역무원분 입에서 나온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탈 기차에 문제가 생겨서 기차 탑승이 어렵게 되었고 그 기차에 탈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치앙마이까지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땅이 넓어서 기차를 타도 약 14시간 정도를 이동해야 한다. 긴 이동시간을 고려해서 누울 수 있는 기차를 선택했던 거였는데 버스에 앉아서 거의 하루를 보내야 한다니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앞 길은 막막하고 역의 대처에도 화가 났다. 다른 시간으로 변경하거나 환불을 할 선택지도 주지 않고 버스로 갈아타라니, 내 앞의 배낭여행자로 보이는 외국인 여성분도 굉장히 화가 나 역무원에게 따지고 있는 중이셨고 나도 도저히 말이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역무원분에게 그럼 따로 티켓 교환이 필요한지, 버스는 어디서 타는지 등등을 퉁명스럽게 물어보는데 역무원분의 표정에 미안함이 가득해서 더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분의 잘못도 아니니까.
버스를 타지 않으면 우리가 세워놓은 일정이 다 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스로 이동하기로 결정했고, 버스장소로 이동하는데 아까 나와 대화했던 역무원분께서 우리가 신경 쓰이셨는지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주셔서 화가 난 마음이 좀 풀어졌다.
버스 탑승장으로 이동해 버스를 보는데 앞길이 막막했다. 버스는 2층버스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좌석은 좁고 화장실은 더럽고 등받이는 제대로 젖혀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2층으로 좌석을 안내받고 담요 한 장과 조그만 생수를 받아서 자리에 앉아 우울하게 창밖을 바라보는데 내 맘과 달리 쓸데없이 날씨가 너무 좋았다. 버스가 출발하고 해가 지기 전까지는 바깥풍경을 보며 버틸만했다. 문제는 해가 지고 난 후였는데
우리나라와 달리 길에 가로등이 많지 않아서 운전은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로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우리 앞 좌석의 아주머니들은 밤이 늦도록 지칠 줄 모르고 수다를 떠셨고 그 덕에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16시간 정도를 달리는 동안 버스는 3번 정도 어딘가에 들러 잠깐 정차했는데, 정차시간이 너무 짧아 혹시 버스가 우리를 잊고 가버릴까 봐 한 번도 내리지를 못했다. 친구는 밤 사이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철문인 화장실문이 노후한 탓에 발등을 피가 나도록 긁혔고 좋지 않은 일의 반복으로 서로 치앙마이는 얼마나 좋으려고 이렇게 액땜을 하냔식의 웃지 못할 농담을 주고받으며 밤사이 배긴 등과 엉덩이를 얻어서 마침내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치앙마이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7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으로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참이었다. 치앙마이의 첫인상은 조용하다! 였다.
어디를 가든 어느 시간이든 시끌벅적한 방콕과는 달리 아침의 치앙마이는 쌀쌀하고 조용했다. 우리가 택시를 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가는 소리만 역 안에 울려 퍼졌고, 택시에 탄 우리는 치앙마이에서의 창밖을 바라보며 치앙마이에서의 하루를 평화롭게 시작했다. 거짓말 같지만 치앙마이의 예쁘고 작은 거리를 달리다 보니 16시간의 버스에서의 기억이 사르르 녹아 잊히기 시작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버스에서의 악몽은 우리가 나눴던 농담대로 좋은 일들을 위한 액땜이 맞았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치앙마이에서의 시간들은 내 20살을 예쁘게 장식하기에 완벽했다.
완벽했던 날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