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모든 일을 미뤄둔 채 책상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가 쓰인 노트는 두꺼운 편이었지만 일기가 쓰인 페이지는 반절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일기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20XX. 3. 5. 목요일
새 학기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 학교에서도 괴롭힘이 시작됐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 학교 애들처럼 돈을 뺏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냥 고아라고 놀리고, 보육원 냄새난다고 눈치 주는 것뿐이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나만 참으면 끝나는 문제니까. 돈을 뺏기면 원장님께 죄송해진다. 항상 내 편의를 봐주시려고 의무도 아닌데 용돈을 챙겨주신다. 생활비 대신이긴 해도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이번 학교는 정말 잘 버텨보기다. 할 수 있어, 지안아.
20XX. 3. 23. 월요일
전 학교 애들보다 심하지 않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여기 애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나를 괴롭힌다. 여기 애들은 나를 죽일 듯이 팬다. 처음에는 잘 안 보이는 곳만 때렸는데 들키지 않는다는 걸 안 지금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비롯한 잘 보이는 곳들도 때린다.
내 몸이 도화지가 된 것 같다.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으로 알록달록하게 든 멍들이 꼭 구름 같아 피식, 헛웃음도 나온다. 그럼 내가 하늘인 건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모두가 건드리지 못하고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하늘이 된다면 내일, 그리고 내일모레 아플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나만큼은 원장님을 실망시킬 수 없어….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봐야겠다. 힘내자. 열심히 살면 누군가는 이 시절의 나를 알아주겠지.
20XX. 4. 1. 수요일
아이들의 괴롭힘이 점점 더 심해져. 못 견딜 것 같다. 도움, 도움을 청해야 해.
20XX. 4. 6. 월요일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하지만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걔네가 모범생이라는 이유였다. 그 아이들의 부모님이 잘났다는 이유였다. 내가, 고아라는 이유였다. 처음으로 나를 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보고 싶었다, 나도, 나도. 엄마, 하고 부르며, 아빠, 하고 부르며 부모라는 존재의 품에 안겨 마음껏 어리광 부리고 싶어….
20XX. 4. 19. 일요일
꼬박 2주를 앓았다. 4월 7일 화요일, 그날은 나에게 지옥과 다름없었다. 애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들은 나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필통에서 샤프를 꺼냈고, 샤프심을 빼지 않은 얇은 금속 펜 촉으로 내 몸 여기저기를 찌르고 긁어놓았다. 찌른 곳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긁은 자국은 여기저기 살이 뜯기고 부어올라 온통 몸이 공책처럼 수많은 실선과 점선을 갖게 되었다. 난 그날 처음으로 심하게 긁힌 자국이 빨갛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집에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날 밤 온몸이 불타는 듯 따갑고 쓰라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몸에 그어진 선 하나하나에서 열이 났고, 그 열은 살갗을 뚫고 내장 구석구석 퍼지는 데 충분했다. 덕분에 세상에 있는 모든 통증을 다 겪고 나서야 열은 그 기세를 거뒀다.
이젠 매일 밤 그런 생각이 든다. 아, 내일 내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라는 무섭고도 잔인하게 안도를 주는 생각.
20XX. 5. 5. 화요일
5월 5일은 어린이의 날.
어린이는 가족 품에 안겨있는데, 난 어디에 있나요?
아냐, 난 하나도 부럽지 않지. 5월의 비가 따스하게 나를 감싸주니까….
20XX. 5. 8. 금요일
5월 8일은 어버이날.
감사할 엄마 아빠가 난 없어서.
늘 내 시야에 가득 담겨주는 하늘한테 감사하기로 했어.
햇빛으로 데워진 옥상 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 몸으로 온기가 전해지면서 마치 하늘이 날 안아주는 듯, 참 포근하더라.
20XX. 5. 18. 월요일
오늘도 수업시간에 나를 툭툭 건드는 아이들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말하신 단어 하나가 내 귀에 선명히 날아와 꽂혔다.
고문,이었다. 선생님은 삼청교육대에 대해 설명 중이셨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그 기관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 고문을 해 거짓 진술을 받아낸다고 했다. 지금의 그 아이들, 그리고 나와 어쩐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20XX. 6. 10. 수요일
나는 여름이 싫다.
숨을 들이마시면 온몸으로 퍼지는 물방울 입자가 마치 내가 물속에서 숨 쉬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상쾌한 바람이 아닌 나를 옥죄는 이 바람이 진짜로 내가 갈 곳이 없게 만들어 버려서, 그 사실이 사무치게 밉다. 나에게 허락된 자리는 더 이상 없다는 듯 나를 물에 가둬버리는 이 여름 속에 있으면 짐짓 서러워진다.
20XX. 7. 7. 화요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생일빵? 오늘 맞은 건 생일빵이라고 칠까.
축하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탓에 편의점에서 초코파이 하나를 집어 들곤 집으로 왔다.
그런데 문득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초코파이를 씹고 있는 내가, 너무도 비참해 보였다.
나조차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이 질문을 수면제 삼아 잠에 들어보기로 한다.
20XX. 7. 10. 금요일
죽는 게 맘대로 안되더라.
20XX. 7. 16. 목요일
제발, 이젠 그냥 죽여줘.
차라리 너희의 발길질과 폭언에 죽게 해 줘.
20XX. 7. 18. 토요일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20XX. 7. 19. 일요일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 제발요.
20XX. 7. 20. 월요일
사실 죽고 싶지도, 살고 싶지도 않아.
그냥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내가 뭘, 내가 뭘 어쨌길래.
20XX. 8.
잘못했어요. 잘못, 했어요.
20XX. 9. 2. 수요일
어느샌가 아이들이 나에게 주는 고통과 원장님이 내게 주는 고통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장님이, 나를 괴롭힌다니, 말도 안 되잖아. 그렇지?
아니, 한지안. 너 이미 알고 있었잖아. 이제 와서 부정하면 뭐가 바뀌어? 원장이 재활용도 안 되는 개자식이라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네 동생들, 네가 죽인 거야. 그리고 넌 그 벌을 지금 받고 있는 거고.
원장님이 어떤 마음으로 다시 돌아오셨는지 생각해 봐. 내가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너를 '교육'하기 위해 돌아오신 거라면? 넌 이제 진짜로 죽어. 살고 싶으면 기억을 좀 더듬어 보던가. 한 5년 전쯤으로?
20XX. 9. 11. 금요일
믿을 수 없지만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움직여야 할까. 하나도 모르겠다. 정신이 온통 분산되어 있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나는 떨리는 내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모든 감각을 차단시켰다. 코를 막고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감으니 그제야 몸이 살기 위해 또 하나의 감각을 틔웠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이 멈추니 떠오른 건 명함이었다. 5년 전 내가 기자 언니에게 달라고 떼를 쓴 명함.
그래, 기자. 기자라면...
아이, 아니 지안의 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 후로는 일기를 쓰지 않은 모양이다. 일기를 읽으며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처절하게 살고 싶었을지, 얼마나 열심히 발버둥 쳤을지, 나는 쉬이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지안은 그렇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간을 오로지 홀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