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우연이 만나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
생각이 많은 요즘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침투한다.
그렇지만 떠난다는 행위가 나에게는 귀찮음으로 다가오고 주저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떠나자는 마음이 드는 순간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는데, 나이 때문일까? 나의 심리 상태가 문제인 걸까? 쉽사리 몸이 움직이지 않는 현실에 또 한 번 마음이 뒤숭숭하다.
반복되는 일상, 자유가 늘어나는 지금 나에게 목적이 없음을 느낀다. 이것저것 벌려놓고 정작 제대로 하고 있는 일이 없음에 나란 사람에 대해 부정적 감정이 쌓여만 간다.
"인간은 사실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이 무슨 개떡 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요즘 내가 그렇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아지고 할 수 있는 건 많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울감이라는 핑계를 들먹이며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의미 없는 시간을 휴대폰과 함께 하고 있다. 이러지 말자. 그렇게 마음먹고 좋아하던 게임을 깔았다. 게임을 하는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게임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게임에 몰입한다. 그래, 몰입. 나에겐 몰입할 무언가가 필요해. 그렇게 게임을 하고 목표를 설정한다.
"늘 했던 것처럼, 마스터 티어까지만 하고 그만하자."
그렇게 무기력한 하루에 게임이라는 녀석이 자리를 채워줬다.
마침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서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브론즈부터 시작하자.
브론즈, 실버, 골드, 플레티넘, 다이아, 마스터
늘 하던 데로 하면 한 달안에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순조롭게 게임을 하면서 새로운 단계가 생겼다는 걸 알았다.
"어? 에메랄드? 뭐야 더 오래 걸리겠는걸?"
그렇게 다이아 2 단계에 올라왔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게임만 했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의 90%는 게임을 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다시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지속했고 수준 높은 플레이어들과의 게임 속에서 내 실력은 형편없음을 느끼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나의 단계를 확인했다.
게임을 하는 시간은 늘어나지만 올라가지 않는 내 단계.
난 도대체 뭘 하고 있고 뭘 위해 이러고 있는 걸까.
생각을 하자. 생각을.
난 늘 그랬다. 뛰어나게 잘하는 건 없어도 못하는 건 딱히 없었다.
조금 하다 보면 대충 알겠고 하다 보면 중간 이상, 혹은 적당한 상위권 수준은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어정쩡한 능력이 날 망친건 아닐까?"
때론 이런 생각에 나 자신을 돌아보곤 했다.
물론, 부정적인 내가 등장했을 때 드는 생각이다.
긍정적인 내가 지배하는 순간에는 난 무었든 못하는 게 딱히 없는 사람.
비록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다방면에서 잘해. 노력하면 그 분야는 더 잘할 수 있어.
하지만 나의 감정 기복이 이 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늘 이도저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렇게 나를 다시 돌아봤다.
그러다가 이하영 작가의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 책을 접하게 됐다.
책에서 말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나는 말을 늘 잘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설득 혹은 공감을 이끄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는 즐거웠고 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찾아다니던 극 E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조금은 주저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내 성향이 바뀐 것일까? 사실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그렇게 책을 통해 말을 잘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정보는 정보일 뿐 그 정보가 지식이 되어 정리가 된 상태로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말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머릿속에 든 게 많아야 할 말도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돌이켜 봤다. 나 역시 그랬다. 다방면에서 못하는 게 별로 없던 모습처럼 20대 때 관심이 있을만한 정보(지식)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머릿속에 정리된 상태였다. 어떤 모임에 나가도 충분히 사람들과 대화를 주도하고 혹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나이가 하나 둘 들면서 분야는 다양해지고 그럴듯한 지식을 쌓지 못한 내 모습이기에 사람들과의 만남, 대화가 이제는 반갑기만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정보다. 나에게 지식이 부족하다.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정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메모장을 펼쳤고 나의 하루에 많은 부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책이다. 평소 책을 적지 않게(?) 읽는 편이다. 하지만 책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한 번 읽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릿속에 남는 건 불과 몇몇 에피소드 정도 일뿐. 하루에 수많은 정보 중에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책을 기록하자.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구, 혹은 키워드를 메모장에 적기 시작했다. 메모장에는 수많은 단어와 나의 감정이 쌓이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메모장을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키워드를 통해 글을 써볼까?"
그렇게 브런치를 켜고 키워드와 나의 감정을 가지고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평소 휴대폰으로 작성하다가 노트북을 켜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다 보니 신기한 감정이 몰려왔다.
"글쓰기가 이렇게 재밌었나?"
늦은 밤 11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최근에 이렇게 몰입해서 무언가를 했던 적이 있나 싶다. 물론 게임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게 나의 일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루고 미뤄왔던 여행을 계획하자. 목적지는 '강릉'
일단 바다가 필요해.
탁 트인 시야,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거친 파도 소리, 낯선 공간. 이 모든 걸 충족해 줄 장소는 역시 강릉이지.
그냥 끼워 맞추기 인 것 같지만 모르겠다. 가자.
그렇게 날짜를 정한다. 4월 26-27일 1박 2일.
구체적인 스케줄은 쉬는 날 찾아봐야지.
그렇게 쉬는 날이 찾아왔다. 신기하게도 그날은 나다움을 맘 껏 느끼는 하루였다.
그동안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살다 보니 나다움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지쳤고 스트레스가 쌓였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몰려왔다.
맛있는 점심, 예쁘게 찍은 사진들, 예쁜 카페, 맛있는 디저트, 먹는 것보다 사진이 먼저 그렇게 나다운 하루를 보내며 카페에서 노트북을 만지작했다.
강릉 맛집, 강릉 숙소, 강릉 게스트 하우스 등 많은 검색어를 통해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한다.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문득 생각에 빠진다.
"내가 원래 이랬나?"
난 늘 목적지만 정했다. 그냥 가서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래, 그냥 나답게 가자. 목적지는 강릉. 끝."
그렇게 나의 여행은 시작한다.
숙소도, 먹거리도, 기차표도 없이 말이다.
여행 전날이 왔다. 불과 한 달 전에 나였다면 아마 여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랐다. 퇴근하고 지친 몸에 방바닥에 누웠다. 그래도 가는 기차표는 끊어야지. 숙소는 잡아야지.
그렇게 휴대폰을 열고 찾기 시작한다.
너무 오랜만에 여행이라 감을 잃은 것일까. 나의 일정이 금요일과 토요일인 것이다. 숙소, 기차 모든 게 매진 상태에 당황스러웠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부지런히 방법을 모색했다.
KTX 대신 고속버스를, 가고 싶던 게스트 하우스 대신 좀 더 한적한 게스트 하우스를 선택한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의 우여곡절 끝에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예약을 마쳤다.
"여행 계획 끝."
짐도 없다. 여벌의 속옷과 양말, 세면도구, 노트북 그리고 책 한 권.
가장 큰 고민은 책이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
평소 주식, 부동산, 자기 계발 서적을 읽는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 이 책들이 크게 당기지 않았다.
그렇게 사놓고 방치해 둔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달의 바다, 망원동에 놀러 가 우연히 발견한 독립서점에서 산 책이다.
달과 바다를 좋아하는데 달의 바다라는 제목만으로도 사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이유인지 그날은 서점지기 분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었던 기억이 난다.
"제가 원래 소설을 읽지 않는데 표지랑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책을 사게 됐어요."
그날도 혼자 망원 거리를 걸으며 센치해진 내가 말을 걸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책이 내 품에 왔고 책장에서 내가 찾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이 책을 다 읽고 오자는 마음으로 출발을 했다.
그런데 버스 이동 시간이 3시간 30분임을 알았다.
"이 정도면 버스에서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약간의 오기가 발동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라 생각보다 몰입이 잘 됐다.
특히, 소설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읽어야 하는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잊고 있었다. 소설의 매력을 말이다.
한 때 추리소설에 빠져서 좋아하지 않던 책을 나름 열심히 읽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책 후반부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요즘 감정이 너무 풍부하다. 눈물의 여왕을 보면서 오열을 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말이다.)
예상과 다르게 여행에서 읽어야 할 책을 버스에서 다 읽어버렸다.
그렇다면 강릉 독립서점 투어를 해야겠다.
그렇게 나의 첫 여행 일정을 계획했다.
강릉시외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독립서점이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서점을 향했다.
한적한 서점, 다른 서점과는 다르게 내부 사진 촬영이 불가능한 부분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서점 분위기를 느껴보니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책을 보다 보니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어느덧 서점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많은 독립서점을 다녀 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시간에 있는 경우는 처음이라 놀라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고 서점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오늘 가져온 책과 표지 색상이 비슷한걸?"
그렇게 기쁜 마음에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계획 여행을 해본 적 있는가?”
생각보다 편하다. 그냥 아무거나 하면 된다. 생각이 필요 없다. 물론 안 맞는 사람이 정말 많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시간에 메여있지 않을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나에겐 무계획이 가장 즐겁다.
특히 나의 경우 생각이 정말 많은 편이다. 쉼 없이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유일하게 생각이 없는 게 여행 계획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기에 더 계획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 없이 사는 유일한 순간인 것 같다. 그래서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걸까?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다 숙소에서 좀 쉬기로 했다.
쉬기에는 조금 아까워 조금 누워있다가 새로 산 책을 가지고 로비를 향한다.
새 책을 펼치는 설렘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자.
나는 지금 그 감정에 충실히 새 책의 포장을 뜯고 책을 책상 위에 놓는다.
사진을 찍고 책을 펼친다.
사람마다 책을 펼치고 처음 보는 페이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바로 에필로그부터 확인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작가 연혁을 펼쳐서 읽고 싶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망원동'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걸 알았다.
'작업책방 씀'
전혀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그런데 문득 망원동이라는 말에 검색을 하고 싶었다. 네이버 지도에서 건물 외관이 보였다.
"어? 내가 갔던 곳인데?"
심지어 오늘 내가 읽은 '달의 바다'를 산 곳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너무 신기했다.
인스타그램을 켜 팔로우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담은 디엠을 보낸다.
이렇게 신기하고 신기하고 신기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읽지 않던 소설을 읽고, 새로 산 책이 오늘 읽은 책을 샀던 공간의 주인이고, 새로 산 책에 담긴 내용이 나를 끌어당긴 부분도 모두가 신기한 일 투성이다. 작은 우연이 다른 우연을 만났고 그 우연을 통해 내가 이렇게 글을 열심히 쓰고 있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 만들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흥미롭지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작가의 글과 이 만남을 통해 나는 글쓰기에 흥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기록, 내가 원하는 걸 담을 수 있는 나에게 필요한, 나에게 소중한 시간임을 깨닫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