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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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抹茶)를 하는 사람들을 다인(茶人)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와 타는 다르다.


즉, 다인이라고 해도 같은 다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사람은 가장 만나기 힘든 분류가 결(結), 균형(Balance)이 맞는 사람이다.


결(結)이라는 것은 쉽사리 곁을 내어 주지 않는다. 우연히 가지게 된 다회의 찻자리에서 나는 내가 아닌 타에게 그러한 격을 배우게 되었다. 다완을 고르고 있던 나에게 질문한 이도 우리 조선의 찻사발이자 밥그릇, 이도 (井戸) 맞습니다.라고 시작된 연(緣)...


차 하세요? 저 말차 합니다.

다완 아세요?

예, 어떤 거 같으세요? 묻는다.

그래서 이야기한다. 형태와 색, 누군가가 찻잔으로 썼던 차 자국과 서명...

어울림.. 그것은 격이다. 찻사발을 둘고 있는 모습에서의 격.

이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차 하러 가시지요..

예...


나 이외의 타와 조우했다. 그것도 유명하신 분들을... 명함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진여원 선생님 그리고 장옥순 선생님 오늘의 주선자셨던 이슬 선생님 다회(茶會) 장선생님과 진 선생님의 주도로 시작했다.


차는 연결(連結)로서 시작된다.

그리고

차(茶)는 차(茶)로 말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찻자리에서 오고 간다. 그러면서 시작된 기물이야기. 조선시대 백자잔으로 마시는 차 한잔의 향기는 주말의 특별한 여운이다.




세상은 넓다. 생각은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본 그 형태 즉 마음의 유지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우라센케(裏千家)의 마음일까 차로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순간이다. 차를 좋아하니 기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입한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차에 대해 이야기 한다.


차(茶)를 어떤 마음으로 술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가에 따라 기본이 정해진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차를 한다는 것은 여유이며 여백이다. 여백은 무한을 뜻한다. 차는 여백을 또한 여백으로 인한 스스로에게 있어 무한을 가져다준다. 이 무한의 기본적인 예기와 예의가 바로 격(格)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대 사회에서는 이 격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슬 선생님은 이야기한다. 이것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또한 진 선생님은 제주에서 오신 작가 선생님이셨다. 제주 섬 집 밥을 출간하시고 출판기념회를 하셨다 한다. 선생님의 제주 생활 그리고 차 이야기에 더블어진 음식 이야기는 다회를 더욱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특히 기가 막힌 집 내부 다실은 정갈하신 성정을 더욱더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호기심이 일었다.


동기상구(同氣相求)를 비롯한 초록동색(草綠同色)이라는 한자가 있다. 이것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뜻으로 물이유취(物以類聚)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이지만 문득 갑작스레 천시불여지리지리불여인화 (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라는 말이 떠올랐다.


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

하늘이 주는 좋은 때는 지리적(地理的)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적(地理的)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和合)만 못하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는 다회에서의 나 그리고 타와의 화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생각한다. 다회가 주는 본질적인 의미는 격의 전달 그리고 마음으로서의 서로가 서로 간의 배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말차와 더불었던 우리 술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호기심 천국이다. 000주와 말차는 최고의 콜라보라고 생각된다. 이여진 이야기는 고미술 하시는 고미술협회의 장 선생님의 말씀이셨는데, 전한다라는 의미가 다른 뜻으로 전달되어 왔다. 예인당을 운영하시며 진 선생님과는 친우분이시라 하신다.


傳하다.

사전적 의미는 동사로 어떤 것을 상대에게 옮기어 주다는 의미이다.


전달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은 나와 타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장 선생님은 있는 그대로의 본을 이야기하신다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회상(回想)이다.


올바르고 순수하게 전달하는 일은 결코 현대 사회에서는 쉽지 않다 생각한다. 그것 그 본에 대한 가르침은 기물을 다루는 차를 다루는 이에게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마음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순수가 그 마음이 바로 차(茶)이다. 술역시 그러하다. 세상에는 이러한 순수가 너무도 많은데 나는 그러할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2.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타인이란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말이 될 수 있고, 나의 행동과 내가 빚어내는 모든 결과물들은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라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보통의 존재 / 이석원 p.218 / 달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 대한 관심을 구한다. 관심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나 자신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이다. 물론 친구의 경우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성격과 성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비슷한 환경을 공유하고 공감했기에 무시될 수 있다. 환경적으로 동화된 이해가 그것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사회의 구조는 인정받지 못하면 성공하기 힘든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인정이라는 것은 상대방과 나 즉, 자신과의 다름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사회적 인정의 기준은 매우 차겁다. 그러가에 나와 우리들은 이 인정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물론 여기에는 실패가 수반된다. 이 실패의 과정은 스스로에게는 자기 성찰의 기회로 다가올 수 있지만 이것은 또한 좌절이라는 피해를 수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게 성공하기 위해 혹은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성찰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데에 문제가 있다. 환경을 자신의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그마만큼 의 노력과 시간의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공을 연단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이 곧 경험이다. 경험을 축적한다는 것은 내공을 쌓아 나아가는 것과 같다.


자신을 안다는 것. 이 주제파악의 현명함이 상대방에 대한 의미 즉 인정의 첫걸음이 된다. 모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내공을 지니려면 이 첫걸음, 연단의 기본 걸음은 이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경이 다르다고 어렵고 힘들다고 투정 부릴 어유가 없다.


차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첫걸음의 연단(鍊鍛) 즉 내공을 바로 올바르게 쌓아가는 길이다. 또한 발걸음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대 사회에서 내가 다인(茶人)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결(結)의 부재,즉진 선생님께서 이야기하셨던 동기상구(同氣相求)초록동색(草綠同色)의 부재와도 일맥상통한다.


오늘 다회에서 모인 타, 선생님들과는 좋은 연(緣)으로 이여지기를 바램해 마지않는 현재의 지금 지금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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