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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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스로 다룰 수 없는 시간, 한없이 침투해오는 과거나 주위의 무한정한 공간을 받아들이는 표현쪽이 훨씬 자유롭고 풍요롭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시간 속의 공간 공간 속의 시간에서 나는 늘 무한을 느낀다. 나와 타의 조우는 나에게 있어 무한이며 여백이다. 공간의 장소에서 나는 타를 응시하며 타는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조우한다. 조우는 연결이다.말차를 한다. 일상에서의 만남이라는 것은 때로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주지만 때로는 바라보는 시각 즉 시선의 경험차로 인해서 트러블이 발생되기도 한다.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시간은 통제되지 않고 나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공간에서 나는 나의 일을 한다. 일을 하면서 대면하는 타는 나에게 있어서는 타일 뿐이다. 그러나 처음의 그 타가 나를 워한 타로 변화하기 시작하면 나와 타의 공간 속의 시간 그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한정 펼쳐저 있는 공간에서 우리들만의 장소가 그 시간이 함께하고 있는 공간의 흐름이 장소에서 발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다가섬의 시간을 나 스스로가 공간의 장소에 녹임으로서 그 흐름이 나와 타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흐름을 무난하고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미학 그것이 나만의 사회생활의 key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스러운 흐름의 미학, 그리고 정중동과 고요...


시간은 몹시 느릿느릿하게, 그래도 결코 뒷걸음치지 않고 내 안을 통과해 갔다. 일 분에 정확히 일 분씩, 한 시간에 정확히 한 시간씩. 느리게 나아갈지언정 거꾸로 가는 법은 없다. 그것이 그때 내가 몸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것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시간 속의 나 그리고 현재의 사회 생활 속에서의 나, 타가 바라보는 타로서의 나. 말차 한잔의 푸르름 그리고 다완이 주는 따뜻함의 온기. 스믈스믈 올라오는 풋풋한 치향 속에서 시간과 나 자신을 되내어 본다.


日日是好日...



2.

'차'는 항상 예(禮)로 이어진다. '차'에 법이 섞이면 저절로 다례(茶禮)가 된다. 예는 법이자 형식이고 형태이다. 차를 달이는 일을 법에 맞도록 하는 것은 차를 달이는 행위 가운데서 쓸데없는 동작이 걸러지고 없어서는 안 될 것만이 남는 것이다. 그것이 결정(結晶)이 되고 저절로 형태를 낳는다. 여기에서 다례가 생겨난다.


다례는 동작의 형식화라고도 할 수 있다. 형식이라는 말은 자켓 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워서 우리들은 그것을 종종 '모양화 라고 부른다. '차'의 형태는 동작의 모양화이다. 모양이라는 것은 사물의 모습을 축소한 형태이고 말하자면 단순화, 요소화(要素化) 된 것이다. 그 요소적인 것이 강조되어서 표현되면 저절로 모양에 이른다. '차'의 동작이 원소적인 것으로 환원되면 '차'의 형태가 생겨난다. 그 때문에 형태를 떠난 다례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 형태가 다도의 선조 몇 명에 의해서 나누어져 몇 개의 유파를 형성했다. 그 중의 하나인 우라센케(裏千家, Urasenke)는 일본 다도(茶道)의 유파 중 가장 큰 유파이다.


다도(茶道)의 형식과 형태, 모양화 사물의 모습을 축소 함축한 것이고 이것이 환원되면 차의 형태가 나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형태의 본질이다. 환원되면 형태가 나온다. 이것은 함축적인 요소화 되어 모양을 펼처 나아간다. 이 단순화가 형이다. 형은 모양의 규칙일 뿐이다. 즉 정중동의 고요에서 사람의 전체적 모양의 형일 뿐이다. 반복된 훈련과 학습에서 모양의 규칙성이 일원화 된다.


간결하다. 그리고 깔끔하다. 그러나 형의 모습만으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다. 이 부족함의 한 부분 그것이 바로 태이다. 의미를 파악해 보면 사전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형태 (形態)


1.명사 사물의 생김새나 모양.

2.명사 어떠한 구조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체가 일정하게 갖추고 있는 모양.

3.명사 부분이 모여서 된 전체가 아니라, 완전한 구조와 전체성을 지닌 통합된 전체로서의 형상과 상태..


단순한 생김새 모양이 아닌 구성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형상, 이것은 전체성울 지닌 상태의 형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전체성울 지닌 상태, 이것이 바로 태(態)이다.


차는 태가 기본이 되었을 때 형이 완성된다. 이것이 형태의 본질이다.


차의 미학과 태의 기본 그리고 말차가 주는 즐거움을 생각해 보는 현재의 지금이다.



3.


타인의 시선으로 본 나...


유심히 완을 고르는 이에게서 고요한 삶의 태도를 배웠다.


그는 말차 수업에 쓸 다완을 고른다 했다.


손끝 하나만 조심스레 움직이며 완 하나, 또 하나를 들어 빛에 비추고, 손에 얹어보았다.


만년필을 수집하는 이들이 하나의 대상에 몰두할 때의 눈빛, 그 깊고 조용한 시선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시선에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스레 다완 추천을 부탁드렸다.


완을 고를 땐 형, 태, 빛깔, 얼굴과 손의 감각, 그리고 타인의 시선 속 기물과 내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봐야 한다고 무심히 말하였지만 그 말엔 오랜 시간과 사유가 담겨 있었다.


그는 두 개의 완을 내 손에 번갈아 올려보게 한 뒤, 한 점을 바로 골라주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직 공부가 부족한 나는 내 눈에 차는 것, 내 손에 익은 감각만을 따졌을 뿐, 기물과 나 사이의 연결성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몸에 익은 태에서 형을 알 수 있다.


작은 기물 하나를 고르는 손끝에서 우연히 마주한 그의 격을 나는 삶의 태도로 읽었다.


그는 수 년간 일본 다도와 말차를 공부해왔다 하셨다.


형과 태, 겉과 속의 조화, 기물의 외형과 쓰임의 품격을 그에게서 배운다.


나는 스스로 본질을 묻는다.

나는 왜 다도를 하는가? 각자 이유는 다르겠지만, 내게는 타인을 대하는 마음, 나를 마주하는 자세, 작은 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고 싶었던것 같다.


나의 삶에, 나의 태도에 조금이라도 스며들길 소망한다.



4.

차를 하는 선생님께서 다회에서의 글을 개인 sns에 옮겨도 되겠는지 물으셔서 흔쾌히 수락했다.


다도(茶道)를 한다는 것은 수양이다.


차의 미학과 태의 기본을 형으로 유화 시킨 것이 바로 다도(茶道)다. 그러나 현재에는 태(態)보다 형(形)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된 것에는 현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바라보는 시각의 바라봄과 무관치 않다. 바라보는 것에 대한 직관적인 것이 우선시 되는 것이 현재의 지금 그리고 그 시선이다.


우리들은 형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되돌려야만 한다. 밖에서 형태를 받아들이지 않고 안에서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 형태로만 다가서서 마음을 잊으면 그것은 진실한 형태가 되지 않는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야기한 이것 마음을 안에서 부터 나타내는 것 이것이 바로 태(態)이다.


태(態) : 모습 태.


1.태도(態度), 몸가짐을 말한다.


능(能)히 일을 할 수 있는 자신(自信)에 찬 생각(心)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데서 「모양, 태도」를 뜻함.


여러 가지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能力)을 뜻함.


재능(才能), 현능(賢能)의 뜻의 본디 글자. 나중에 음(音)을 빌어 주로 자태(姿態)의 뜻에 쓴다.


능히 할 수 있는 모습으로서의 태를 분석해 본다면 아래에 마음심(心)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밑바닥에서 부터 받치고 있지 않으면 모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형태(形態)는 마음이 받치고 있는 기본을 이루지 못한다면 형성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차를 함에 있어 형이라는 모양을 중심으로 한다면 진정한 차맛을 이루어 나가는데는 쉽지 않을 것이다차를 왜 하는가? 이것은 수양이라고 생각한다.


수양은 오래되면 일상화가 된다. 일상화가 된 선생님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모습에서 형(形)이 아닌 태(態)를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작하나 하나에 그리고 차시와 손목으로 이루어지는 격불의 미학, 그 안에서 퍼져 나가는 푸르름한 말차의 냄새... 이윽고 방안을 가득 채운다.


수양은 예(禮)다.


예(禮)는 곧 격이다. 자세하나에서 타의 격 상대방의 격이 흘러 나온다. 말차는 그러한 것이다. 선생님이 나에게 본 것. 완을 고르고 있는 나에게서 본 것은 눈의 시선이며, 그것은 또한 나의 격이었고 마음이였다.


시선은 바라봄이다. 바라봄이라는 것은 태를 이루는 바탕 중의 바탕 즉 심(心)이다. 심을 바르게 예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적시할 수 있는 이는 격을 갖춘 사람이며, 태의 기본을 지닌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


차 하나의 미학 그리고 마음하나의 태(態)가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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