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차를 하시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라는 공통점과 생각이 비슷한 점이 많았기에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 스르륵 흘러 버린다.
오늘은 그 한계가 없음을 또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차를 하다 보면 많은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집중을 하게 된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나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회를 하거나 아니면 다회(茶會)의 중심이 되는 팽주(烹主)일 때는 다른 입장이 되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대면의 미학이다. 내가 아닌 타를 대면하고 바라보았을 때, 그 타 역시 나를 바라보고 대면한다. 무엇을 전달할지 무엇을 이야기할지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면의 시작이라면 찻자리에서의 대면은 조금 다르다.
찻자리에서의 대면은 바라봄에서 시작된다. 오롯이 나 홀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볼 수 있는 만큼 보인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는 것 즉 시각은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는 매우 중요한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보는 것은 각기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보는 환경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학습된다. 반두라(Albert Bandura)의 말처럼 경험은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며 학습은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으로 나타나 각기 다른 각각의 객체 즉 나와 타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 보는 시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보는 시각을 성장시키는 방법은 좋은 것들만을 골라 보는 선택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조금은 제한적인 방법이기는 하나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것들...
좋은 작품, 좋은 장비, 좋은 것에는 이름이 붙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품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좋은 것에 대한 생각은 단순하게 물건이 좋아서라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명품은 그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 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거기에 독창적인 것과 그 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정신을 불어넣는다. 그것이 일반적인 것과 다른 차별성과 독창성을 지닐 때 나와 타는 그것을 명품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이 이름으로 인하여 바라보는 시각의 시선이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좋은 것들은 보통 한 가지 만을 추구하는 고타와리에서 생성되게 된다. 물론 세상의 눈을 속이는 짭 명품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곧 시각의 시선에서 사라지며 기억에 남지 않는다.
우리가 소중하고 귀하게 셍각하는 것이 있다. 예로부터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바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금과 보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보통 명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명품이 되려면 일정한 조건을 클리어해야 한다. 한 가지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을 것. 이것을 현재까지 꾸준하게 업으로 실행하고 나아가고 있을 것. 스스로가 아닌 타에게 그 독창성을 인정받을 것 보통은 이 세 가지의 조건을 만족시키면 그것은 명품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금과 보석을 다루는 브랜드들 중에서 티파니 앤코 그리고 카르띠에 등등이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며 명품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금과 보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술또한 그러하다. 선생님과 얼마전 있었던 다회에서의 술 이야기를 꺼냈다. 차와 술의 콜라보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의 위대함을 경험한 아로서는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농산물인 쌀과 밀 그리고 물과 누룩 이 단순한 것의 조합이 차와 기가막힌 장단을 이룬다. 이를 만들어 내는 생산자 그리고 마음이 담긴 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장인들이 아닌 타 즉 소비자들이다.
한 가지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물건들을 아름답다. 그리고 그 표현이 세계적이다. 타의 그것에 대한 인정은 기본이다. 그리고 차별된다. 이 차별된다라는 것은 보통과는 다르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다른 시각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격이 다르다는 시선의 다름에서 파생된 말이다.
미술에서의 작품들도 그러하다. 우리의 도자기가 그러하며, 회화 작품, 그리고 공예 작품이 그러하다. 대표적으로 고려청자와 이조백자들을 들 수 있다.
나와 선생님이 좋아하는 다완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오늘의 주제는 조선의 회화가 대화의 주가 되었다.
먹과 선의 아름다움. 그리고 여백이 주는 미학. 조선 전, 후기의 수많은 화상 중에서 작자 미상인작품들에서 오는 느낌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조금 더 동지애적 느낌을 주었다고나 할까...
회화의 여백에서 오는 느낌.. 그 무한의 공간에서 그림 한 점의 공간 그리고 그에 대한 공감..
선생님은 작자 미상의 그림 2점을 나는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남계우(南啓宇)의 나비 그림인 화접도(花蝶圖)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시각의 바라봄에서 찾아드는 공감..
사람도 그러하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할지 몰라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가 점점 상승하여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표현할 때 우리는 존경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람들을 대면함에 있어 그 시각의 시선이 달라지듯이 우리가 어떤 것을 접할 때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바라봄의 미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시선에서 나오게 된다. 보는 것에는 상하가 없는 것이다. 같은 시각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선의 관점을 어떻게 보는가는 개개인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일반적인 바라봄과 차인(茶人)으로서의 바라봄은 다르다. 대면을 할 때의 태(態)가 다른 것이다. 이것은 고요와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고 바라보는 것에 대한 차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그 심안(平常心是道)즉, 이것은 바라봄을 자라게 만든다. 고요속애서 발견하는 나이며 이것은 태로 연결이 된다. 이 자라남은 곧 바라봄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나의 안목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바라봄에 대한 환경적인 차이 및 개개인의 성정에서 기인한다 할 수 있다.
이 바라봄의 학습과 배움을 하나하나 쌓아간다면 이것이 수양이다. 또한 언젠가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하나의 존경받는 나로 주변에 대접을 받지 않을까 ...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나에게는 말차 였다. 또한 이러한 것을 만들어 나아가기 위한 격의 수양과 자세 그리고 태도에 있어 차와 이 차담은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비밀스러운 것이였다.
또한 이는 감사이며 격이자 태의 성장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현재의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