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상.

by Doc



사물을 사랑한 것은 다인(茶人)들이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물에 빛이 난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그들만의 것으로 나타낸 것은 아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언제 누구로부터 어디에서 사랑받아도 좋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치우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기이한 것이나 버릇을 집어 넣은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보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랑한 것은 보편적으로 사랑받아도 좋을 가치가 있었다. 사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들이 사랑한 것을 같이 사랑하게 마련이다.


다인들이 사랑한 물건들은 누구를 향해서도. 어디에 놓여도 "봐 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어떠한 명기 옆에 놓여도 특별히 일등감은 없다. 보는 사람은 그 이름다움을 처음으로 지켜 봐준 그들에게 그리움을 느낄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 그 기물로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공간속의 시간 시간속의 공간에서 만나는 장소를 그들이 제시해 준 것이다. 지인들이 선택했던 기준인 다기는 남다른 자기로 생각할 수 있다. 보면 볼 수록 아름다운 것은 여기에 신비한 무엇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장점마지도 정연하게 갖춘 완벽한 그들이다. 만약 다인들이 놀랄 만한 것에만 놀란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러나 그들의 시신 그 눈은 좀더 정확했으며 보다 진전되었다. 색다른 것에서 색다른 면모를 본 것이 아니다. 평범한 것에서 색다를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기물은 생김새, 무게, 모양, 색깔이 존재한다. 고가의 것 호사스러운 것. 정교하고 치밀한 것. 이례적인 것에서 꺼낸 것이 아니라 평이한 것. 손퇴한 것. 검소한 것 간단한 것. 무난한 것에서 발견해 낸 것이다. 그들이 차를 마득했던 것은 요원한 아름다움에서가 아니다 현실에 입각한 아름다음에서이다.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보다 직접 교류하는 아름다움에서 사랑을 느꼈다. 관념에서가 아니라 생활에서 한층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주시했다. 이른바 아름다움을 멀리에서부터 가깝게 옮겼다. 친숙함에서 아름다움을 그 본질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것이 차인 즉 다인이 느끼는 일상 생활에서의 미학인 것이다.


그 기물이 바로 즉 첫사발이다.




말차는 예민하다. 말차 기루의 제다는 가장 어린잎의 두세개의 찻잎으로 부터 시작한다. 그 잎을 차광해시 만들어 낸다. 불랜딩하고 가장 순수하고 독립적으로 차의 색과 맛을 입힌다. 이것의 옷이 바로 다완이다.


다완의 마음은 기장 수수하고 평이하고 솔찍하고 검소하고 간단한 그리고 무난한 것에서 시작된다. 단색의 아름다움 그리고 소박한 형의 미학. 차시로 차를 담고 차선으로 격불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을 담아 나에게서 타로 전해진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부분을 타의 손의 앞쪽으로 넌지시 내민다.


찻사발의 마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다.


일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평이하게 그리고 예기와 예의를 담아 진출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다완 즉 완(碗)은 그러한 마음이 있다. 전달하고 공유하며, 공감하고픈 마음의 진실. 그 진정어린 진정성의 마음의 표현이 완의 전달이다.


말차의 여운 그 무한 그리고 여백의 공간은 차향기와 더불어서 심화되고 나에게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이윽고 전달되는 그것이 표현되는 것이 바로 차. 말차의 맛이다. 그리고 그 맛을 담아내는 것 그 진장은 완판에 시작된다. 다인과 다인의 공장 그리고 연결은 한 진이의 차로 이여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연결 공유 그리고 이에 대한 순수의 전달 그 근본은 다인의 손끝에서 즉 찻사발 그 외관의 태(態)에서 시작된다. 평범하고 수수한 일상 속에서의 여유 그리고 말차가 주는 행복의 원류의 시작은 오늘도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 오전 그리고 말차 한 사발의 차향기와 그 맛을 가득품은 완(碗). 찻사발과 다인(茶人)인 나 그리고 그리움이 공존하는 현재의 지금, 지금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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