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상

by Doc




차(茶)는 지금도 성(成)하지만 도(道)까지 성하다고는 할 수 없다. 뒤돌아보면 쇠퇴한 오늘날을 한탄(恨歎)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한 사람의 다인도 찾아볼 수 없다.


도(道)는 마음 깊이와 관련 있다. 기술이 미미한 점그릇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가벼운 죄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의 준비를 정연하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그릇 치는 것과 같다. 마음이 깊지 않으면 다도(茶道)는 진정한 다도가 아니며 다도라고 할 수 없다.


마음의 것은 개개인의 수양(修養)과 관련이 있다. 수양(修養)을 바라보는 것 즉 이것은 시각(視覺)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시각은 배움과 학습의 창(窓)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시각의 시선은 자신 스스로가 매우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지구가 좁아지고 그 복잡성에 의해서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가 되면 될수록 인간의 표현 방법은 단순화와 상호적인 행위상과 메카닉한 객관적인 기초성에 의해 추상화 양직화 코드화 되어 간다. 이러한 것은 다양한 사회에서의 개인화 즉, 개별화에 기인한다.


사회는 개별 구성원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즉 집단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집단회에 있어서 개인의 창의성 그리고 생각의 자율성 등은 집단 즉,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제약을 받게 된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지켜나가야 할 것 이것이 표준화된 것이 법(法)이다. 표현(表現)에 있어서의 정도가 구분된 것이다. 이 기본을 어떻게 지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이러한 기본은 시각(視覺)에서 즉 바라보는 것에서 바탕이 될 수 있다.


바라보는 시각 시선에서의 이동 그리고 이것을 구성하는 바라봄의 마음이 다인(茶人)에게는 곧 다인의 법이다.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주변의 환경과의 차이가 이것을 만들어 나아가는 기준이 되고 이것은 각기 다른 개인과 나에게 투영된다. 다인 즉 차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법이란 형(形)이 아니다. 그 형의 기본이 되는 태(態)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태(態)는 사리지고 형(形)이 주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 아닌가 메카닉한 기호심. 추상화 양직화 코드화는 이것을 말해주는 기본의 형이다. 또한 이 형을 나타내주는 표현일 뿐이다. 어떠한 것을 수용해 나아가는 관심. 즉 보는 시각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수용의 예식 또한 각기 다른 개개인의 속에서 해석되게 된다 차인 즉 다인(茶人)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바라보는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보는 것에 대한 치아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와 타 보통의 타인 사람들은 바라보는 것 보는 것의 차이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대동소이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보는 것이 차이는 생각 이외로 크다. 각기 다른 개인의 가치관 즉 생각의 생각에 따른 차이가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인에게 있어서 이 생각의 차이는 니와 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보는 것의 차이. 즉 안목(眼目)을 길러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목. 1. 시즌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이라고 사전적인 의미는 표현되어 있다. 안목(眼目) 눈 안. 눈 목이다. 눈의 힘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이는 시각의 차이도 있을 수 있으나 보는 시각의 차이를 높이는 기예가 바로 안목이다.


이 안목의 진정성이야말로 차인인 다인(茶人)에게 있어서 마음의 준비. 즉 기본과도 같다. 모든 것을 행함에 있어 바라보는 시작 마음의 바른 자세와 태도가 안목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다인이 되는 것의 기본은 그 태를 그 마음을 기물에 담아 내가 아닌 타에게 전하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진정성, 그 마음에 다인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현재의 지금. 지금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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